십자가에 대한 찬반 논쟁은 예로부터 있었다.
한쪽에서는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거룩한 상징물로서 성도들에게 감사의 징표가
된다고 옹호를 하고, 다른쪽에서는
십자가는 인간이 만들어 낸 우상물이기에 우상물을 만들어 놓거나 그것에 절하고 경배하면 안 된다고 반박을 한다.
이쪽 저쪽 말을 들어 보면 … 둘다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각설하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십자가가 예수님을 “대신” (Replacement) 하는 형상이냐, 아니면 예수님을 “상징” (Symbol) 하는 형상이냐 하는 것이다.
대신하는 것에 절을 하면, 하나님을 대신하는 이방 신상이나 하다 못해 돼지머리 같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징하는 것에 절을 하면, 그 상징물 자체가 아닌 상징물을 통한 그 원체인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경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전에 내가 알던 중절모를 즐겨 쓰시던 모 장로님은 놋으로 된 오래 된 회중시계 (Pocket Watch) 를 주머니에 항시
넣고 다니셨다.
더 좋고 가볍고 편리한 손목시계 (Wrist Watch) 가 있는데 왜 그리 무겁고 오래된 회중시계를 가지고
다니시냐고 물었더니, 그 시계는 장로님의 아버님께서 6.25 때 부득이 가족과 헤어지면서 외동 아들인 자기에게 준 사랑의 증표라고 하였다.
그 장로님은 그 시계 자체를 사랑한게 아니라 그 시계가 가지고 있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 깊은 연유땜에 그 시계를 아끼고 항상 포켓에 지니고 다녔던 것이다.
그 시계 속에 담긴 그 기억을 사랑한 것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네 거리에서 교통경찰이 호르라기를 불며 교통정리를 한다.
놀랍게도 산 만한 큰 트럭들이 그 경찰의 손 시그널에 고분고분 따르고 있다.
그 경찰관 남자의 힘이 트럭보다 세기 때문이 아니다.
그 경찰관 제복 뒤에 숨어있는 공권력이 세기 때문이다.
경찰복과 경찰봉은 공권력의 상징이다. 상징 자체에도 Power 는 있다.
왜냐하면 나라가 그 Power 를 그 경찰관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그리고 실제로 엑소시즘을 하는 목사/신부들을
보면, 발악하고 컨트롤이 안 되는 귀신들린 자에게 십자가를 들이대면 마치 포승줄 받는 사람같이, 질겁을 하고 후퇴를 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다.
그 손바닥만 한 십자가가 무슨 그 자체에 힘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십자가가 상징하는 그 십자가 뒤에 있는 그분의 능력을 마귀들도 인정하고 굴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어떤 물건 자체의 특성 보다는 그 물건의 상징성이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루터를 이어 종교개혁을 이어 받았다는 쯔빙글리는 십자가를 교회당안에서 금지시키려 했다.
바로 이 쯔빙글리가 더 나아가 성직자 가운착용 그리고 교회음악도 폐지하려고 개혁을 단행한 사람이다.
개혁 Mind 가 있고 신학적 깊이가 있는 사람도 과유불급의 실수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모양이다.
우상과 상징을 구별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성도들이 모일 때 깃발에다 각종 동물 그림을 그려서 들고
다닌다면 이것은 우상숭배 행위인가 아니면… 일종의 예술/치장 행위로 보아야 하는가?
실제로 이스라엘 각 지파의 깃발에는 각종 동물들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고 (예, 유다 지파의 사자), 성막이나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도 여러 가지 “형상”을 수 놓거나 조각해서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 이것이 우상숭배 행위인가?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에게 계속 불순종하게 되자,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라고 지시하신 적이 있다.
구리뱀 … 그것도 우상숭배와 관련 된 것인가?
우상숭배와 상징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럴줄 알고, 주님은 후에 니고데모에게 이 놋뱀이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상징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예전에 독실한 크리스천인 모 탤런트가 주말 연속극을 찍으면서 극중에서 돼지머리를 놓고
절을 하고 굿도하고 부처상에 합장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매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런 우상 숭배 행위는 과감하게
관둬야 한다고 다그쳤기 때문이라고 훗날 고백하였다.
드리마에서 무당같이 돼지머리에 절하고 스님같이 부처상에 합장하는 것이 우상숭배인가?
연기와 우상숭배를 그렇게 구분할 수 없는가?
그러면 최악의 케이스인 사탄 역할을 하면 그건 완전 100% 구원을 잃고 마는가?
연기는 연기일 뿐이다.
제발 Common Sense 를 가지자.
나도 들은 얘기인데, 어느 부흥사가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무엇에 기분이 나쁘셨는지, 강대상 뒤에 걸려있는 십자가가 우상이라고 장로들을 올라
오게 해서 당장 치우게 했다고 한다.
(그 담임목사님 표정이 어땠을까 매우 궁금하다.)
대부분 교회에 걸려있는 십자가들은 평범하다.
반짝반짝 빛나고 네온사인같이 색깔이 바뀌고 금도배를 했거나 어마어마하게 큰 십자가는
보지를 못했다.
적당한 크기에 재질도 평범하다.
어떤 가난한 교회 십자가는 플라스틱이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라면 그 우상을 볼품없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걸어 놓을 리 없다.
그리고 그것을 대게 한쪽 벽에 걸거나 가운데 걸려면 (프로젝터 화면때문에) 좀 작은 십자가로 걸어 놓았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감사한다는 상징적인 표증이기도 하다.
정체가 들어나면 죽는 그 시절, 크리스천들은 땅에다 물고기 표시를 하며 서로를 확인했다.
그것이 우상물이라고 우기는 자는 없을 것이다.
빵집은 빵을 그려놓고 우리가 빵집이라고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걸어 놓고 교회라고 한다.
So, what’s wrong with
that?
십자가를 크게 만들어 놓고 주일날 와서 그것에 뽀뽀하고 그것을 껴안고 그것만 만지다가
돌아가는 성도들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상 어쩌고를 떠나 근처 병원에 먼저 데리고 가야 할 것이다.
그런 비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테두리에서 십자가를 만들어 걸어 놓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그 사랑과 소망을 확인하고 감사드리는 우리들의 행위가 정말<우상숭배> 에 가까운 것이란 말인가?
Common Sense 를 가지자.
누구는 교회에 음악없이 … 그래서 오직 예배에만 집중하는 … 예배를 드리자고 주장하였지만 그래도 교회에서 찬송가 소리가 흘러 나오는게 더 교회
답다.
찬송도 예배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아무 것도 장식하지 말고 그냥 예배만 드리자고 하지만, 크리스마스때 누구에게는 유치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아기예수 장식도 하고 크리스마스 트리도 만들어 놓는게 더 교회 답지 않은가?
절간에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하는 것 보았는가?
쥐 죽은듯 조용한 것 보다 시끄러워도 방언이나 박수소리나 아멘소리가 그래도 터져 나오는 것이 훨씬 교회답다.
그런 맥락에서 교회에 십자가가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것 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크리스천
적이다.
WWJD 를 적용하여, 예수님이 교회를 방문하신다면, 십자가를 우상이라고 화를 내시며 걷어 치우시겠는가 아니면 … 그래도 너희들이 나의 죽음을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 라고 생각하실 것인지… 궁금하다.
문제는 과유불굽... 너무 지나치면 나쁘다는 것을 빼 놓고는.
그것이 아니라면, 교회에서의 십자가는 우리의 정체성의 상징물이다.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표”라고 한다… 증표다… 우상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찬송가 150장 “갈보리산 위에”
(Old Rugged Cross) 를 한번 들으며 마음을 달래 보자.
그것도 여러분들이 좋아할 Elvis Presley 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