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가지 버전이 있지만 내가 들은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미국 서부시대 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여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 되었는데, 그날 아침 누구에게서인가 전보 (Telegram) 을 받게 되었다.
지금이야 전화도 있고 텍스트 문자도 자유롭게 주고 받을 수 있지만, 1800 년도에는 그래도 제일 빠르고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communication 방식이 Telegram 이었던 모양이다.
사연인즉슨, 이 남자와 오랫동안 대화를 끊고 있었던 남자의 아버지가, 망난이 처럼 방황하던 아들의 결혼 소식을 전해듣고 마음속으로 고민을 많이 하다가, 그래도 아들인데하며, 큰 맘을 먹고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고 축복 해 주려는 마음으로, 가장 빨리 메세지를 보낼 수 있는 telegram 을 이용해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아버지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성경구절의 내용을 다 보내면 Telegram 값이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그냥 그 구절의 장과 절만 보내기로 하고, 담당자에게 1 John 4:18 (요한일서 4장 18절) 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알다시피 요한일서 4:18절은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로 시작하는 사랑의 힘을
강조하는 아름다운 구절인데, 담당자가 성경지식이 없어서 인지 그만 John 앞에 붙는 “1” 을 생략하고 1
John (요한일서) 4:18 대신 John (요한복음) 4:18 로 보내 버렸다.
식장에서 하객들 앞에서 아버지의 축사를 낭독하려고 성경을
펴서 요한복음 4:18을 읽어 보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로 시작하는 기막힌 구절이 나왔다.
식장이 묘한 분위기로 변하였다는…. 아마도 그냥 지어낸
조크 일것이다.
글 한자 차이도 이렇게 중요하지만 말 한마디 차이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라는 속담이 있다.
말 한마디에 살고… 말 한마디에 죽는 케이스도
수두룩하다.
밤에 자다가 실수로 (?) 잠꼬대중에
딴 여자 이름 불렀다가 결국 이혼한 부부도 있고 뒤에 사장이 서 있는줄도 모르고 동료들에게 영웅심 (?) 을 자랑하듯 사장 욕 하다가 잘린 직장인도 있다.
반대로 어렵지 않은 말 한마디 때문에 큰 이득을
본 사람들도 나는 많이 봤다.
<삶을 바꾼 말 한마디> 라는 좋은글 모음을 우연히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말들이 적혀있다.
'수고했어' 라는
말 한마디가 피곤함을 씻어주고,
'고마워' 라는
말 한마디가 새 힘을 얻게 하며,
'괜찮아' 라는
말 한마디가 부담을 덜어주고,
'사랑한다' 는
말 한 마디에 무한한 행복을 느끼고,
'고생한다' 는
말 한마디에 힘든 줄 모르고,
'잘한다' 는
말 한마디에 어깨가 으쓱해지고,
'행복하다' 는
말 한마디에 자부심이 생깁니다.
좋은 말 한마디 … 비싸지도 않은데… 많이 자주 해 보도록 했으면 한다.
그런데 이왕이면 말을 할때 상대방과 같은 마음으로 같은 처지에
서서… 말을 해 준다면 그 효과는 더 클 것이다.
옛날 이조 시대에.. 남자와 혼인을 한지
겨우 3년도 안되어 과부가 된 여인이 있었다.
그 당시는 과부가 된 여인이 큰 이변이 없는 한, 평생을 과부로 수절도
하는 풍습이 있었는지라, 이 여인의 절망은 말할 수 없이 컸을것이다.
몇날 몇일을 식음을 전폐하고 주위에서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진다”,
“애도 없으니 큰 걱정은 없지 않느냐”, “남편이 물려 준 돈으로 걱정없이 살 수
있지 않느냐”, “우리가 도와 줄테니 아무 걱정 말아라” 등등.. 그 어떤 위안과 위로의 말을 해도 듣지 않던 이 여인이 … 왠일인지 인근에 사는 어떤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나서 …. 마음에 평온을 찾고 … 정신을 차렸다는 얘기가 있다.
나중에 물어 보니 그 할머니가 딱 한마디 했다고 한다.
“니 3년만에 과부되었다고
슬퍼한다고 했다지… 이것아 나는 혼인 3일 만에 청상과부되어
지금까지 50년 수절했어~”
나랑 아무 연관되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듣기 좋은
말로 나를 위안해도 그 말은 형식적으로 그냥 흘러가 버리는 <남>의 말 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하는 말 한마디는… 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가 있다.
그래서 과부에게는 과부를 보내야 하고, 신세타령하는 전과자에겐
전과자 과거를 디디고 일어난 사람이 가야하고, 가난한 서민에겐 가난한 서민 출신 국회의원의 말이
먹히는 법이다.
교회 전도도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 해 볼 수 있다.
복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교리와 이론이
들리겠는가.
무조건 우리쪽으로 오라며 파워풀한 메시지만 던져 주는것 보단, 과부가 과부를 찾아가듯
우리가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며 행동으로 보여 주는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Powerful 한 메시지인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 그 어느 시기엔 통했다. 그 통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그때에는 아무리 개망나니 깡패들이나 꼭지가 돌아간 술주정뱅이나
세상불만 충만한 반사회적 인간들이라도… 교회 근처에 가면 자연적으로 몸을 추스리고 언행에 조심하던… 때였다.
비록 복음을 이해 못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어도, 교회 지도자들에게 거만하게
대어드는 사람이 드물었던, 성도들의 언행이 일치하고 복음의 명령과 실행이 일치하던 때였다.
지금은 어떤가?
전철에서 두 아줌마가 쌍욕을 하며 싸우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견디다 못해 일어나서 나가며 하신 말씀이란다.
“옛기 이 사람들아.. 여기가 무슨 교회인줄
아나 소란 피우며 싸우게”
교회의 인격적 윤리적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 물론 사탄의 차근 차근한 <전략> 덕분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아직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 승부를 걸 수 있겠는가?
그 말을 강력하게 담대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을 외치는
사람의 생활 속에서의 그의 언행이 그의 믿음과 일치 하는가?
한때 강력해던 그말은… 이제는 이론적인… 상투적인… 형식적인 … 말로 밖에는 … 세상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라는 ‘말’과 그렇게 하라는
사람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기 떄문이다.
Where is the Beef?
1984년도에 유명한 Fast
Food 체인인 Wendy’s 에서 시작된 이 Catch Phrase 는 이내 미국 전역에서 강력한 (정치적인) 메시지가 되었다.
이 말의 Hidden Message 는 “Where Is the Substance of Your
Statement”? 다.
즉, 당신이 말하는 그 아름답고 훌륭하고 멋진… 그 생각이나 말의… ‘눈에 보이는’ 증거는 무엇인가? 라는 말이다.
전도하는 자들의 언행이 일치하는가? 교회에선
거룩한 성도 집에선 세속적인 사람… 교회에선 선량한 장로 집에선 무절제한 사람… 교회에선 솔선수범하는 집사 집에선 나태한 사람… 교회일엔 희생적인 성도 집안일은 나
몰라 인간…
Who are these people? Do we
call them Christians??
과부가 과부를 찾아가는 Relate 된 삶… 그것은 행동이 말을 찾아가는 삶이다. 말과 행동이 같이 일치하는 삶이다.
그런곳이라면, 한마디의 말이.. 한마디의 위안이… 한마디의 전도가.. 큰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상실된 이 시대에,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은.. <언행일차> 를 회복하는 것이다.
특히 크리스천들의 언행일치!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