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중국에서의 실화가 신문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중국의 어느 마을의 노총각이 펜팔을 통해 도시에 있는 여자랑 연애를 하게 되었다.
사진도 교환하고 그랬나 본데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고 한다.
약 1년후 이 여자는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짝짝짝!!!
다만, 그 상대 남자가 시골 청년이 아니라 그 청년의 편지를 매일 매일 배달하였던 우체부였다고 한다.
내 앞에 눈으로 보이는 실상이 편지 속의 허상보다 나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릿말에도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있다.
한번 따져보자.
원래의 당사자들은 시골 청년과 도시 아가씨이다.
우체부는 시골 청년의 Love Letter 를 도시 아가씨에게 전달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부터는 그 편지의 <내용> 보다는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에게 관심이 더 끌리게 되었다.
나중에는 편지는 뒷전이고 우체부가 주인공이 되었다.
이게 원칙적으로 보아 잘못 된 것임을 우린는 알고 있지만… 이런 일이 드물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어쨋든 이런 현상은 우리들의 삶에 부작용을 많이 파생케 한다.
한국에서 7080 시대에 대학다니면서 데모에 한두번씩 가담해 보지 않은 남자는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도 고등학교 3학년때 얼떨결에 데모에 가담한 적이 있다.
한번은 수업이 끝나고 보충수업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미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고 있는 선배 몇명이 교실에 들어 오더니만, 인쇄된 종이를 나누어 주면서 .. 왜 우리들이 들고 일어나야만 하는 이유를 조목 조목 설명해 주었는데, 정치에 관심이 없던 나도 그만 … 꽃히고 말았다.
그의 논리와 이유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타당했고 멋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어울려, 철없는 고3이 정치에 뭘 알겠느냐만, 거리로 나아가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한번 돈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턴.. 그 이유가 무엇이건… 논리가 무엇이건.. 일단 그 선배가 주동하는 데모에는 거의 자발적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 당시 그 선배의 “선동적” 의도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이 많이 돌았지만, 이미 나는 그의 의도나 목적이나 논리가 중요한게 아니라, 이제는 그 선배 그 자체의 “매력”과 “카리스마”에 뺘졌기에 … 다른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았고.. 누가 뭐래도 그 선배를 따를 각오까지 되어있던 것이다.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음악도 그렇다.
처음엔 어떤 가수가 부른 노래에 매료된다.
그 가사가 마음에 와 닿고 그 가수의 창법에 매료된다.
그러다가 그 가수의 앨범을 더 사서 듣게 되고 드디어 팬이되고 마니아가 된다.
이제 마니아 경지에 이르면,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그 가수 자체를 숭앙하게 되는 것이다.
가수가 추구하는 음악..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그 음악의 매력은 이제 뒷전이고, 내 눈에는 이제 … 그 가수만 보인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처음엔 소문으로 듣고 BTS 의 음악을 들어 보고 그들의 음악에서 희열을 느끼고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아미 (Army) 도 그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이제 그 아미들은, 더 이상 BTS 의 음악때문에 결집되어 있는게 아니다.
그들은 이제 BTS 라는 그 아이돌 가수 그 자체에 관심과 열정이 있다.
BTS 가 어떤 앨범을 가지고 나오더라도 그들은 환호할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의 내용이 더 이상 중요한게 아니라 BTS 라는 거대한 실체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의 Entertainment 계에서 뛰고 나는 흥행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Strategy 다.
주위를 둘러 보기 바란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연사들… 엔터테이너들… 정치인들.. 종교인들을 보라.
그들이 처음엔 개념있는 연설을, 매력적인 내용을, 국가를 살리는 민족중흥 (?)의 공약을 그리고 초심의 메시지를 전달했었다.
그러다가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인기 유지 또는 증진을 위해 개인기에 힘을 싣게 된다… 그러다가 지지자들의 관심이 그 목적이나 내용에서 “사람” 이라는 자기 자신에게 옮겨지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도 당연히 바뀌게 된다.
당연히 성취감을 느낄 것이고, 자만감 그리고 보상심리가 생기게 된다.
보상심리란… 내가 이정도 했고 내가 이제 이 정도 위치에 올라와 있으니 응당한 대우와 인정과 보상을 받아도 당연하다는… 초심과 원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욕심’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란 묘한 존재이기에, 일단 이런 욕심이 생기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예전의 초심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다.
초심을 없애버리자! … 라고 아예 작정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자연스레 그 초심을 잃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극 소수의 진정한 Hero 나 leader 들은 정신을 차리고 초심을 회복하려 마음 속의 욕망과 사심을 Control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실지로 자신을 그렇게 돌아보고 채칙질하고 방향을 다시 바꾼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 의문스럽다.
관중석에서 무대를 쳐다 볼 때와 무대 위에서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관중석을 쳐다볼 때가 다르듯이, 그들은 이미 Control
Phase 를 넘어선 것이다.
이 상황에선 그들이 관중석으로 내동댕이 쳐 지거나, 관중들이 외면하거나, 하늘에서 벼락을 맞아, 정신이 순식간에 다시 돌아 오지 않는한… 그들은 영원히 초심으로 돌아 오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의 실화에서 과연 누가 나쁜 사람인가를 생각 해 본다면… 시골 청년일 수도 있고 도시 여자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우체부는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도시 여자가 손가락질 받을 확률이 제일 높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치가나 예술가나 종교계 리더나.. 그들이 초심을 잃고 사욕에 가득차게 된다면, 당연히 그들의 잘못이 크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우리들도 공범이라는 책임을 회피하진 못할 것이라고생각한다.
작금의 교계를 보면, 과연 저 분들이 왕년에 그토록 신실하고 희생적이고 오직 예수만 알던 그분인가… 눈을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에게도 있다.
손가락으로 무엇을 가르키면, 가르키는 그 것/곳을 바라 보야야 한다.
그 손가락을 보고 있으면 … 바보다.
강대상에서 목회자가 메시지를 전하면 그 메시지를 보아야 한다.
매력적인, 카리스마한, 지적인, 유모러스한, 멋진… 목사의 모습에 매료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손가락이 가르키는 그 방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바라 보고있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과 예수를 쳐다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를 전하는 전달자를 보고 있는 것이다.
전달자라고?
아… 생각나는가?
그렇다 .. 바로 그 우체부 아저씨 얘기다.
시골아가씨가 Love Letter 의 그 내용을 보고 기뻐해야 하는데 그것엔 관심이 없고, 그 Love Letter 의 전달자인 우체부를 사랑한다면… 무언가 이상한 그림이 되지 않냐는 말과 동일하다.
목회자들의 perspective 가… 나는 전달자다.. 라는 것이라면… 우리들의 perspective 는 … 우리는 전달자를 보지말고 그가 가르키는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 유지되면 어느 교회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목회자가 전달자가 아닌 spot-light 받는 대상이 되고, 우리는 그가 가르키는 메시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가락을 바라 본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몇몇 목사님들은 성도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되기 시작하면 목회를 접고 reset 하여 다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분들이 그렇게 하는걸 보니까, 그일이 어렵긴 하지만 결코 impossible 한 일은 아닌듯하다.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님들… 왕년에 명성이 자자하셨던 원로목사님들…
자기만 바라보게 교인들을 바보로 만들어 놓으신 분들도 많다.
그 많은 바보들이 지금도, 어디를 쳐다 볼지를 몰라, 아직도그 손가락만 바라보고 따라 다니고 있다. 그게 목표물인양… 진짜 과녁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바보들이 스스로 못 고친다.
손가락 소유자들이 .. 그 방향을 정확하게 가르켜 줘야 한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손가락에 번쩍거리는
금가락지는 끼지
말어야 한다
그 명예와 부의 금빛 가락지 때문에
바보들이
그것만
쳐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