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칼럼

Page Title Facebook 커뮤니티에 연재된 스티브의 페이스북 칼럼입니다. 생활속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개인의 생각과 의견을 모았습니다.
제목Facebook 칼럼 (277) – 온수와 냉수에서 얻는 교훈2024-07-02 13:43
작성자 Level 10

오늘 아침 세수를 하면서 새삼스레 깨달은 것이 있다.

보통 세면대의 물을 일단 나는 온수와 냉수를 동시에 튼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온수와 냉수가 혼합되어 미지근한 물이 되어 나온다.

다음 조금 따뜻한 물이 필요하면 온수를 튼다.

그러면 나오는 물이 따뜻하게 된다.

그런데 따뜻한 물이 필요할 온수만 계속 틀어서 뜨거운 물을 많이 공급하려고 하는 대신 차라리 차거운 냉수를 조금 줄였더니 놀랍게도 (?) 나오는 물이 따뜻해 지는 놀라운 (?) 진리를 새삼스레 발견하게 것이다. ㅎㅎㅎ

자금까지 나는 냉수도 조절을 해야 하는데 나는 거의 대부분 온수만 가지고 올렸다 내렸다 하며 물의 온도를 조절하였던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온수도 있고 냉수도 있다.

내가 하고 싶은것, 내가 사고 싶은 , 내가 가고 싶은 , 내가 먹고 싶은 이것들이 <온수> 들인 셈이다.

내가 원하는 내가 추구하는 것들이다.

반면에 내가 버리지 못한 것들, 내가 하지 말아야 것들, 나의 나쁜 습관들, 나의 오만 편견 등등 이것들은 <냉수> 들이다.

우리가 인생에 던져졌을 .. 우리는 온수와 냉수에 노출된다.

그런데 대부분 온수만을 틀려고 한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틀고

달콤한 명예를 위해 틀고

막강한 권력을 위해 튼다.

행복을 위해서 온수를 트는 것이다.

그런데 온수꼭지도 이상 없는 끝이 있다.

그래도 있는지 용을 본다.

냉수라는 옵션이 있는 것을 잊은 모양이다. ㅎㅎㅎ

냉수를 살짝만 내리면 따뜻한 행복이 나올 있는 것을 말이다.

물론 냉수든 온수든 줄이면 나오는 물의 용량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인생의 스케일은 줄어들면 안된다라고 생각들을 한다.

작은 스케일의 인생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영웅같이 이름을 날리고

변화무쌍한 사건들을 경험하고

방대한 서사시의 주인공같이 넓은 스케일을 소유해야

멋진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행복은 밖으로의 넓이가 아니라

속으로의 깊이라고 한다면 잘못된 말인가?

우리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온수를 틀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다.

내가 어느정도 부를 축적했어도

온수를 틀고 싶듯이 많은 부를 축적하고 싶어한다.

상황에서 냉수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다.

나의 쓸데없는 욕망

성공을 향한 과한 추구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거만함과 남을 얕보는 마음

투쟁속에서 생기는 오만과 편견

이런 냉수들을 줄일 마음은 애시당초 없는 것인가.

그것만 조금 줄인다면

이상 온수때문에 스트레스 쌓이지 않아도 되고

나에게 전달되는 행복의 온도는

따뜻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옛날 산골에 갑돌이와 갑순이가 살았다.

갑돌이는 아침이면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해서 그것을 팔아서 하루이틀 연명하는 나뭇꾼이다.

갑순이는 애들 키우고 살림하다가 저녁때면 남편을 미소로 맞이한다.

옆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부자인 김첨지네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식사를 떄면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가난하고 쪼달리게 보이는 갑돌이의 집에선 웃음소리가 들린다.

갑돌과 갑순이 그리고 아이들의 대화와 웃음소리가 펴져나온다.

그런데 김첨지네 밥상 앞에선 고함소리가 들리고 밥상이 엎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영감.. 우리 집으로 옮깁시다.. 남들 보는 눈도 있는데.

아부지.. 몇마지기만 줘유~ 장가가기 전에 나도 먼가가 있어야 되잖유~

아부지.. 줘유 비단저고리 한벌 사야겠시유~

김첨지네는 온수만 자꾸 틀어 행복을 추구하고 있고.

갑돌네는 냉수를 줄여 행복을 조절하고 있다.

어려운 일이다.

맞다.

남들이 비까번쩍 인생을 살아가는데

혼자 독야청청하는 도사도 아니고

광야에 독거하는 사도요한도 아니다.

행복의 정의가 무엇인가?

만일 내가 홀로 무인도에 표류하여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때도 행복의 기준이 많이 좋게.. 이겠는가?

현대인의 행복의 기준은.. 남과의 <비교>에서 온다.

남보다 많이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이 행복의 레벨을 결정한다.

말짱하던 김여사가 동창회에 갔다 오더니만

남편을 달달 볶는다.

고등학교때 축에도 끼던 선숙이가 남편이 사장이 되더니만

몸을 보석으로 치장하고 삐까번쩍한 외제차를 타고 나타나

동창모임 파티 음식값을 호호호~ 웃으며 지갑에서 블랙카드를 꺼내 결재를 하더라..

하며 어리둥절하는 남편을 원투 스트레이트 어퍼커 까지 먹이고 있다.

회식 석상에서 자기 딸이 이번에 쥴리아드 예비학교에 입학이 허가 되어

장학생으로 다음달에 미국으로 간다는 정부장의 말은 들은 김부장..

집에 와서 책상 앞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애꿎은 딸애를 기여히 거실로 끌어내서 지질이도 공부를 못하냐.. 닭몰듯 한다.

비교가 낳은 비극이다.

오해 중의 하나는.

행복은 만드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을 만들려면 .. 행복에 대한 강한 염원을 가지고 귾임없이 노력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의 의지 (Will) 통해 열심히 노력하면

행복이라는 (Way)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Where there is a will, there’s a way .

이게 맞는 말일까?

맞는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이룰 있다는 말이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반대로

Where there is a way, there’s a will 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열신히 노력해서 행복을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우리의 인생 경험을 통해서 과연 100% 맞는 말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니면 나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Way) 성실히 가다 보니 (행복) 보이게 되는 것인지.

내가보기엔 행복은 창조하는 것이라기 보단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고, 발견은 이미 되어있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행복을 창조할 있겠는가?

그럴수 있다 해도 인간이 창조한 행복은 완전한 행복이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가 창조한 행복을 가지고서도 이상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자체가 바로 행복이 불완전한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발견된 행복안에서는 나는 만족할 있다.

왜냐하면 행복은 인생이 이미 만들어 놓은 행복이라는 공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가 아닌 우리의 인생에 의해 행복이 만들었져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생의 섭리를 통해 인간이 발견할 있도록 인생사 속에 감추어 두신 <자각> 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내가 자각하고 발견하는 것이지, 의지를 통해 만들어지고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콘셉을 이해 한다면 우리는 죽을 까지 항상 노력하고 투쟁하여 행복을 얻으려고 평생을 허비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 행복은 Measurable (측량이 가능) 그리고 tangible (만질 있는) 형태의 유형물이어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유형물인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Immeasurable (측량불가) 그리고 Intangible ( 만질 없는) 형태의 무형물이다.

어떻게 무형물을 성취하고 얻으려 있겠는가.

이것은 오직 발견하고 자각하고 시인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Principle 하나는 인생의 기본 원리는 인간이 노력해서 피땀흘려 쟁취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무런 노력없이도 가질 있게 이미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각이고 발견이고 그리고 시인이라는 <선택> 있을 뿐이다.

구원의 원리를 보면 자명하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래도 인간이 피나는 자기의 노력을 보이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는 무엇을 가지기 위해선 무언가를 노력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Give and Take 논리가 팽배해 있기 떄문이다.

어느 마을에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가고 있다.

불쌍히 여긴 사람이 차를 세우고 할머니를 태웠다.

그런데 할머니는 차인에서도 짐을 머리에 매고 있다.

그러시냐고 했더니

감사치례는 해야 마음이 편할 같아서.. 라고 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의 짐을 감히 내려 놓지 못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했지만 황송 스러워서인지 먼가 그래도 찜짓해서인지 짐을 쉽게 내려 놓지 못한다.

내가 선행을 해야 보답으로 무엇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그냥 공짜로 주는 것이라고 해도 가재미 눈을 하며 의심한다.

어떻게 구원이라는 것을 내가 아무런 노력 안하고 자각하고 발견하고 시인한다고 얻을 있단 말인가 인간의 논리로 따져보는게 우리 인간이다.

완벽하게 만들어 놓으시고 그냥 take 하라는데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하는 우리 인간이다.

행복도 구원같이.. 값없이 이미 만들어 놓으시고 주시는 것이다.

노력한다고 얻어지는게 아니다.

그러나 진리를 발견하고

은혜를 자각하고

초청을 시인한다면 그게 행복이다.

인간이 시간과 노력을 통해 만들어 가는 그런 행복과는 비교할 없는 진정한 행복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는데 이제 그만 논리를 접고 진정한 행복으로의 시각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게 아니다.

길이 있는 곳에 뜻이 있다.

행복은 만드는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곁에 있는 행복을 잡자!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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