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그런건 아니지만, 대 부분의 목사들은 <선교>에 생명을 건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대형교회나 소형교회나, 목사들이 선교를
최 우선 목표로 삼는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신임목사나 노장 목사나 선교 사업을 가장 큰 사역으로 꼽는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많은 교회가 예산의 큰 부분을 선교에 책정한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대부분 성도들은 교회 빼기 선교는 Nothing 이라고 교육받는다.
나는 선교의 사명과 중요성이 잘못 되었다는 얘기를 하는것이 아니다. 나는 때론 지나치게 때론 과장되게 때론 잘못된 해석으로
때론 정치적인 목적으로 선교가 ‘무조건’ 적 사역으로
변하고 있지는 않는지 걱정하는 성도일 뿐이다.
일단 대부분 목사들이 들고 나오는 성경귀절을 보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당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야할 말씀이고.
그런데 이놈의 한국인들의 특성 때문인지, 앞 부분 중간부분은 거두절중하고 끝부분인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만 강조 강조 강조한다.
말씀을 잘 보아야 한다.
“ 내 증인이 되리라” 란 미래형 및 명령형은, 2가지 전제조건과 과정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증인이 되기 전 바로 전 조건은 “권능을 받고” 다.
권능도 없이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증인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전에 또 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다.
권능 자체도 성령이 임하셔서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어느 때가 되어 우리가 성령에 감화되고 준비가 되고 그리하여 권능을 받게되면 그때가
바로 증인으로 말하자면 선교에 맞는 시기가 기회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성령으로 권능도 받지 않고, 선교에 선자도 모른채, 나의 생활에
성령의 열매는 커녕, 내 자신 신앙 자체도 확립되지 않은채, 뚜렸한 신앙적 목표도 수립되지 않은채, 무조건 무조건 선교를 위해 push 하야 된다는 말인가?
여기서 생각해 볼것이 <구제> 다. 구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축복의 원리중 하나이며, 믿음과 은혜의 강조만큼 선행과
함꼐 equally 강조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즉, 선교만큼 중요하고 하나님이 직접 성경에 분부하고 권고하신 것이 바로 이 구제인 것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구제> 라는 단어는 성경에 많게는 (번역본에 따라 다르지만) 20 여 구절정도에 걸쳐 “직접적”으로 쓰여있다.
그러나 이 <선교> 라는 단어는 ‘증인’ 등을 포함하여 “간접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골자는 <선교>나 <구제>는 다같이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권고하시고, 분부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선교가 더 중요하냐 구제가 더 중요하냐 라는 질문은 참 어리석은 질문이 될것이다. 찬양이 더 중요하냐 기도가 더 중요하냐
라고 묻는다면 이것처럼 더 어리석은 질문이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교회는 찬양이 뜨거운 교회가 있고, 어떤 교회는 기도가 뜨겁다. 만일 이중 더 중요한 것이 분명히 있다면 아마도 그쪽을 강조하는 교회만 살아 남을 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역사가 공존하고 있다.
여기서 조심스레 한마디 하고싶다.
목사의 입장에선 당연히 구제보단 선교가 자신의 목회에 유리하다.
더 그럴듯하고, 명분도 더 좋아 보이고, 목회자의 평판에도
도움이 더 되고, ‘티’ 가 더 크게 나고, 은퇴후까지 자신에게 도움이 더 되는것이 사실이다.
불쌍한 이웃 돕고 홈리스 먹여주고 고아원 도움 주고 양로원 보살피는 목사가 크리스챤 신문에
크게 기사 나는 것 본적은 가뭄에 콩나듯 하나, 러시아에 선교센타
설립하고, 과테말라에 큰 교회당 지어주고, 캄보디아에 큰 신학교 세운것 보도하는 대문짝만 한 크리스챤 기사는 수시로 보게 된다.
내가 목사라도 똑같은 돈 들인다면 후자가 훨씬 나에게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선교란 너도 나도 무조건 뛰어들 사역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선교할 때와 시기와 거쳐야
할 과정이 분명히 있다는 얘기다.
선교나 구제나 사실은 그 ‘무엇’을 Share 한다는 맥락에선 그 본질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왜 목사들이 예외없이 교회를 담임하면 가장 강조하는것이 <선교> 사역인가? 구제 사역은 덜 중요한가? 찬양사역은 덜 중요한가? 제자훈련사역은 덜 중요한가?
선교가 중요하지 “않다”는게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일과 사역에 분명한 Balance 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한것도 문제지만 좌로나 우로 너무 쏠리는것도 성경의 이치가 아니다.
어떤 개척한지 얼마 안된 교회는 새 목회자가 부임해 왔는데 무조건 예산의 반이상을 선교에
써야 축복받는다고 결국 그 교회 예산 거덜내고 자기는 쏘옥 빠져 딴 교회로 갓다는 얘기도 들었다.
어떤 목사는 소형교회의 부족한 예산가운데도 5-6군데 선교사에게 매월 선교금을 보낸다. 장로들은 그저 목사가 하나님의 자상명령이라고 성경을 들이대니 대꾸 한마디 못하고 아멘하며 따를 뿐이다. 그리고 목사는 매년 선교지를 방문한다, 이게 사역인가 ‘여행’ 인가? 가서 사역을 하는가 아니면
갑.을관계 확인하러 가는가. 가서 대우받고 사진찍고
돌아 오는길에 한국들러 미리 정해 놓은 친구 교회에 가서 집회 몇번 하고 (좋은 말로) 휴식하고 (나쁜 말로) 즐기다 오지는
않는지.
그 여행 비용이면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 예산에 쪼달리는 구제 기관들에게 큰 도움은 못되도
감사하는 도움은 될것이다.
그리고 왜 정기적으로 바쁜 선교사들 불러서 ‘보고’는 시키는건가? 만일 진정한 선교사역이라면 하나님의 사역은 그냥 ‘믿고’ 맡기는거다. 무슨 사업이고 장사인가 확인을 하게. 정 미심쩍으면 선교후원 실행 이전에 충분한 조사 (due diligence) 를 거쳐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저엉 선교사 불러 휴식시키려면, 아예 편안한 휴양지로 비행기표 끊어 직접 보내 드리는게 밎다. 괜히 후원교회 방문하여 죄인처럼 눈치보고 심리적으로 불편하게 1주일 보내다가 다시
돌아가게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선교사 불러, 생색내고, 그러지는 않겠지라고 믿지만, 은퇴후 어떤 거쳐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할말은 없다.
옛말에 <가화만사성> 이란 말이 있다.
<치국평천하> 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은 어떤 큰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거쳐야 할 그 어떤 과정이나 조건이 있다는것을 말해
준다.
나는 목사들이 무조건 무조건 선교 선교하는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작은 교회는 어느 정도 자립하기까지 내실이 필요하다. 그러는 동안 성도들의 신앙과 교회 기관의 사역구조를 정립시킬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엔 그 다음이 선교다.
집안 살림 때려치고 교회집회에만 매달리는 어머니들을 보아도 쯧쯧 못 마땅하게 생각한다면, 당연히 교회 선교에도 적덩한 때와 적당한 개입의 정도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교회내에 불쌍한 성도들이 있으면 그들을 구제해야 한다. 부피가 큰 선교는 큰 교회가 할 수 도 있다. 선교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선교에 focus 하기 전에 선행될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제발 신참 목사님들에게 부탁이다.
성경읽고 축척된 그 성경지식과 수 많은 사례에서 느껴온 교회성장이라는 그 비법 (아마도 선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것이다) 을 그 때와 그 시기를 못 기다라고, 성질 급한 자랑스런 한국인 답게, 지금 당장 빨리 무조건… 이란 자기의 지극히 개인적인 목회철학으로 .. 온 성도와 교회를 극한으로 push 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말 그 목회자는 선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선교를 그렇게 Push 하는, 뜨거운 가슴이외에, 뜨거운 머리에서 계산된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만일 그것이 선교의 동기가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제일 목적은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선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결국 선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선교는 예배를 위한 기능의 일부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교회는 예배 처소이지 선교센타가 아니다. 다시 말해 선교는 교회 존립의 목적이 아닌 기능인
셈이다. 그러므로 목적과 기능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가 살면 각종 예배를 위한 기능이 자연스레 살아난다. 예배에 은혜받으면 기능이 강해진다. 그러므로 예배를 튼실히 확립한후 선교를 함이 맞는 원칙이다.
이것은 먼저 얘기한 사도행전 1장 8절의 원칙과 일치한다. 즉, 예배를 통해 나에게 먼저 성령이 임하시고, 그 다음 상숙된 예배를 통해 성령님이 나에게
권능을 주시면, 비로서 나는 증인이 되어 선교를 “자연스레” 할 수 있다는 원리이다.
이런 원리도 모른채 믿음도 없이 훈련도 없이 무조건 선교라는 열차에 성도들을 올라 태운다는것은
얼마나 위험한 모험인지를 알아야 한다.
선교는 물질적인 후원이 아니다. 준비와 권능없이 선교한다는것은 곧 우리가 가진 금전적인 후원을 통해 선교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선교의 참뜻인가? 영적인 권능과 기도없이 무슨 선교를 한다는 것인가?
선교는 믿음의 행위이다. 이 믿음은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으로만 가능케 된다. 나머지 행위는 다 인간적인 발상에서 나오는 일종의 자가최면적인 방법일 뿐이다.
우리가 이런 절차를 거쳐 선교를 한다면 성령님이 역사 하여 주실것이다.
그러나 머리의 열정으로 무조건 선교사역을 감행한다면, 이것은 성령님의 도움이 아닌 우리 인간의 힘과 금전으로
하나님 사역을 하겠다는 것이고, 감히 말하건데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구제> 라는 기능은 궁국적인 ‘나눔’을 위한 일종의
영적인 ‘훈련’ 이라고 본다.
즉, 내가 권능을 받기 위한 훈련인 셈이다. 이건 내실을 위한 훈련이 되는데 구제를 통해 내실을 다지고 그 모멘텀을 살려 궁국적으로 선교를 한다면, 훨씬 더 효과적인 선교사역이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좀 더 이 <구제>라는 기능에 민감한 개입을 하여야
하고 이것을 통해 내실과 권능을 받는 훈련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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