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날.
회사 승진에서 탈락하던 날.
나 대신 승진한 친구이자 직장동료가 술을 사주며 … 다음 기회를 보라고 다독이던 그 억지 술자리를 벗어나 밤 늦게 아파트로 돌아 왔던 날.
그날 역시 나의 아내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끔 다투다가도 며칠 가기 전에 풀어지던 우리였지만
이번 겨울의 긴 냉전은 더욱 더 냉냉했습니다.
벌써 한달이 넘어 가는데 우리사이의 간격은 더욱
더 멀어져만 갔습니다.
아내는 얼마 후 다가오는 출산을 위해 출산 휴가를
신청했지만 출산후 보직을 100% 보장 할 수 없다는 회사방침에 큰 실망과 앞으로의 책임감으로 인해 매우 의기소침 해 있었습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내는 보던 TV 를 끄고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태어날
우리 아이를 위해 꾸며놓은 방으로 들어 갔습니다.
승진이 확정되면 기쁜 소식을 아내에게 깜짝 발표하여
그 동안의 어색한 한지붕 각방쓰기 별거도 해결하고 아내와 함께 앞날 계획도 세워 보려고 한 나의 꿈은 그날 저녁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숨통이 막히는 듯한 상황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아내는 서로 시선도 외면하고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채 … 괴롭고 무거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다음날 퇴근 할 즈음 팀원들이 회식을 한다며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적당한 핑개를 둘러대고 회사를 나왔습니다.
여느때와 달리 그냥 걷고 싶어서 한 정거장 미리
내려서 걸어 갔습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쪽으로 가기 전 사거리 코너를
지나는데 고구마와 군밤 파는 할머니가 나를 불렀습니다.
“총각… “
“아.. 저 총각 아닌데요”
“아 그래? 난 너무나 젊어서 아직 총각인줄 알고..”
“그런데 무슨 일…”
“이거 다 팔고 조금 남은 군밤인데… 떨이로 팔아주면 안될까.. 싸게 줄께”
나는 남은 군밤 두봉지를 아무 생각없이 사들고
아파트로 들어갔습니다.
아내는 이미 자는지 보이지 않았고 나는 군밤을
소파 테이블에 올려 놓고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 갔습니다.
잠시후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아내가 군밤을 먹으며 tv 를 보고 있었습니다.
내 방으로 들어 가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군밤 맛있네”
그러고 보니 아내는 군밤을 좋아 했습니다.
또 그러고 보니… 나는 우리 부모님댁에 갈 때면 감이다 귤이다 잔뜩 사가지고 갔었는데 아내에게는 왜 그리 인색했던지.
군밤이나 호떡 사돌라고 하면 그게 뭐 그리 큰
선심이나 쓰는듯 마지못해 사 주었던 생각도 납니다.
결혼 하기 전 생각도 납니다.
아내가 전화를 하여 팥빙수가 먹고 싶다고 하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밤이라 귀찮을만도 한데 기꺼히 뛰어나가 팥빙수를 사들고 아내집으로 가던 생각도 납니다.
신혼초 생각도 납니다.
무거운 짐을 모두 뺏아 나 혼자 끙끙대며 걸어갈
때면 아내는 내 팔근육을 만지며 “Superman!” 하며 칭찬해 주던 생각도 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나도 모릅니다.
어디서 부터 잘못 되었는지 모릅니다.
다음날.
다시 퇴근길에 한 정거장 미리 내려 걸어 가는데
어제 밤에 본 할머니가 보였습니다.
“아이고 총각… 또 보네”
가던 걸음을 되돌려 할머니에게 갔습니다.
“군고구마 한 봉지 주세요”
내가 왜 고구마를 샀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어쩌면 할머니 모습에서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모습을
그렸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고구마 아주 잘 익었어… 맛있게 먹어”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 가니 아내가 화장실에 있는
모양입니다.
고구마 봉지를 식탁위에 올려 놓고 방으로 들어
갔습니다.
잠시 후 거실에서 TV 소리가 나서 살짝 문을 열고 내다보니
아내가 TV 를 보며 가벼운 웃음 소리와 함께 내가 사 온 고구마를 먹고 있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환한 미소였습니다.
아름다운 미소였습니다.
잘난 군밤과 고구마가 아내에게 미소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내가 씻기위해 화장실로 향하는데 아내가 말했습니다.
“이거… 어디서 샀어?”
“아.. 요 근처에서…”
“옛날 빵모자 할아버지가게 생각이 나네…”
그래 맞습니다.
아내가 살던 집 앞 골목에 있던 인자하게 생기신
할아버지가 만드셨던 그 군고구마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그 군고구마 집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추운 겨울날… 군고구마가 먹고 싶어서 주문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내가 군고구마를 받고서 너무 뜨거워 그만 땅으로 떨어 뜨린 것을 내가 멋지게 받아 준것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사귀게 된 것입니다.
그 때는 작고 소박한 것도 나눠 먹으며 즐거웠는데
그 때의 행복은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다음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내 생일이 사실 2주 후 입니다.
그러나 나는 2주 미리 당겨서 먼가를 하고 싶었습니다.
잘 하면 반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조금 일찍 나와서 근처 백화점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밤색 머플러와 도톰한 겨울 장갑을 샀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외식할 때면 자주 가던 식당에 가서
아내가 좋아하는 소머리 국밥 2인분을 시켜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파트 문 앞에서 나는 잡시 걸음을 멈췄습니다.
친근한 냄새가 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돼지 고추장 볶음 냄새였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내가 부푼 배 위로 에이프론을
두르고 음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들어가는 나를 향해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갑자기 내가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오랜만에 오랜 포옹과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간단한 것을.
잘난 군밤 한봉지와 군고구마 한 봉지면 끝날 일을.
군밤보다 군 고구마보다 작은 나의 마음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군밤 군고구마 할머니에게 감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인생의 큰 문도 작은 열쇄로 열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알았습니다.
사랑에는 적당한 타이밍이 없다는 것을.
사랑은 마음에 떠 오르자마자 실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