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국신문에 다음과 같은 해외토픽 기사가 실렸다.
중국의 어느 산골마을에 한 처녀가 살았다.
그녀는 같은 동네에 사는 한 총각과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그 총각이 다른 큰 도시로 Job 을 얻어 이주를 하게 되었다.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그 총각은 거의 매일 처녀에게 편지를 뛰웠다.
우체국 배달부가 그 편지를 거의 매일 그 처녀에게 빠짐없이 전달했다.
몇달이 흐른 후 드디어 그 처녀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랑은 도시로 이사를 간 그 총각이 아니라 그 처녀에게 매일 매일 편지를 배달해 준 바로 그 우체국 배달부였다.
우리나라 속담에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 는 말이 있다.
중국 속담에도 <원수불구근화> 라는 말이 있다.
이말은 ‘멀리있는 물로는 가까이 난 불을 끄지 못한다’ 라는 말이다.
아마도 그 처녀의 마음 속의 <불> 을 멀리 있는 그 총각의 <물> 즉 편지로만은 끌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저 인간은 옆에서 만나고 보고 얘기하고 가까이 있어야 되는 모양이다.
통계에 의하면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가 냉각기를 갖자고 서로 떨어져 있다가 다시 복귀하여 정상적 결혼으로 다시 돌아가는 확률은 매우 낮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반대로 지지고 볶고 하여도 한 집에서 머리를 맞대고 가끔 눈도 마주치고 저녁도 가끔 같이 먹고 가끔 대화를 하는 부부의 정상복귀 확률은 그렇지 않은 부부들보다 매우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저 인간은 가까이 옆에서 교제를 해야 되는가 보다.
미국 속담에도 “Out Of
Sight, Out Of Mind” 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는 말이다.
이말이 얼마나 진리이면 세계 각국에 이 비슷한 속담들이 다 있다고 한다.
그 동안 COVID-19 팬데믹때문에 교회들이 현장예배가 아닌 각자가 있는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본지가 거의 2년이 넘어간다.
그러다가 이제는 (특히 미국의 한인교회들은) 다시 교회로 나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처음 현장예배를 위해 교회로 다시 나갔을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무언가 서먹서먹하다.
약간은 어색하고 약간은 낯설고 무언가 불편(?) 하다.
당연히 아직도 교회로 복귀하지 않은 성도들도 꽤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교회를 안 나오는 성도들 혹은 인근 교회에 (편리상) 나가는 성도들도 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같은 교회요 같은 목사요 같은 설교요 같은 성도들인데 무엇이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인가?
RCA (Root Cause Analysis: 회사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무엇이 근본 문제였는지에 대한 분석) 를 해 보자면 결론은 한마디로..Out
of sight, out of mind 가 그 정답이다.
결국 신앙과 나의 마음과는 별개라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성도의 신앙의 깊이와 그 성도와 다른 성도와의 교제는 그리 큰 관계는 없다는 말이 나온다.
믿음이 좋은 장로가 반드시 교인들과 교제가 왕성하고 활달하다고 결론을 내릴 순 없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성도인데도 다른 성도들과 오히려 더 돈독한 교제를 가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 온다.
결국 우리들의 교제의 깊이는 우리들이 얼마나 자주 만나고 대화를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이런 습성을 잘 아는 사도바울이 히브리서 10: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그리하자” 라고 권면을 하고 있다.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을 버리자는 얘기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습관> 이다.
이 말은… 모이기를 주저하는 영적침체의 <습관> 이 되었다는 것이다.
습관이 되려면 한두번 안 보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만나지를 않았다는 말이 된다.
COVID-19 때문에
그간
온라인
예배만
보고
성도들이 만나지를 않았던게… 아예 <습관> 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습관을 버리자는 얘기다.
교회 출석하는 것의 제일 목적은 당연히 <예배> 다.
그러나 이런 수직적 기능 이외에도 수평적 기능인 성도들간의 교제도 우리들에겐 예배 못지 않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수직적 기능인 하나님에 대한 예배만 교회의 기능이라면, 나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굳이 장소와 시간의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게된다.
옛날 구약 (예를 들어 아브라함 야곱같은) 믿음의 선배들을 보면 그들은 굳이 성소로 나오지 않아도, 어디 가든지 어디 있던지 그 있는 자리에서 제단을 쌓고 제사 (예배) 를 드린 흔적이 보인다.
신약때에 접어들어서는 모임의 장소가 구체화되었지만 역시 예배 처소는 일률적이지 않았다.
마가의 다락방에서도 모이고 옥중에서도 모이고 길 가다가 만난 사람의 집에서도 모였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있는 집에서… 출장간 내가 있는 호텔방에서… 예배를 못 드릴 이유가 없게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하대로 이 가장 basic이 되고 primary 목적이 되는 예배이외에도 성도들간의 교제라는 수평적 기능을 수행하는 이차적인 목적으로 우리는 교회에 모이는 것이다.
만나서 조잘대고 웃고 먹고 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하는 관점에서 보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일에는 다 순서가 있다.
모여서 교제하고 교제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봉사하고 봉사하면서 헌신하고 헌신하며서 에배에 대한 자각이 정립된다.
다 순서가 있다.
어느 교회는 초신자가 들어오면 어떤 (교육과 훈련의) 과정도 없이 전도와 선교에 Focus 를 두게
하고
즉각
참여를
시킨다.
담임목사가 <선교> 에 사명이 꽂히면 다른 모든 기능들은 그저 부수적인 기능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간혹 있다.
선교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도 다 순서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선교를 외치며 항상 주장하는 말…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는 말도한다.
그러나 순서가 있다.
선교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 <권능> 을 받아야 한다.
권능 없이 선교에 뛰어들면 부화뇌동으로 그저 시키니까 봉사하는 것과 같게 된다.
그런데 그 권능이전에 <성령> 이 임하셔야 된다는게 순서다.
그러므로 최소한 성도가 전문화된 선교에 참여하려면… 그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 성령의 권능을 받은 다음에… 증인이 되라는 문맥이다.
교회 나온지 한달도 안되어 하나님이… 예수님이… 성령님이 누구신지 감도 못잡은 교인에게 .. 선교 안 해 큰일 난듯이 반강제로 (?) 참여시키는 것은 … 사실상 맹목적인 봉사를 하라는 것과도 같다.
하다못해.. 이익과 실적이 목표인 회사에 취직을 하여도 그 사람에게 훈련과 교육을 먼저 시켜 준비시키는 과정이 있는데.. 우리 교회는 왜 이리 급한지 모르겠다.
담임목사가 부임하면 일단 그 교회의 성도들을 관찰하고 기존의 상처와 갈등을 치유하고 교회의 내실을 기한 다음… 훈련된 성도들을 중심으로 선교사역하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부임하자마자… 모든것을 선교위주로 바꾸고 나머지 기능들을 무시한다면, 기존의 성도들은 말할 것이다…. 그럴려면 우리가 차라리 선교사님을 초청하지 왜 담임목사를 초청했겠는가.. 우리는 먼저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살피고 치유하고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우리 교회를 위한 담임목사가 필요했다고…
얘기가 딴 곳으로 흘렀다.
이야기의 골자는 우리 성도들은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여야 교제가 생기고 훈련과 교육도 받을 수 있고.. 그래야 신앙의 성숙단계로 나아갈 수 있고… 진정한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각능력이 생기게 된다.
집에서… 온라인예배로도 충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성도간의 교제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모이기를 폐하면 영적침체의 습관이 생기고.. 그 습관이 장성하면 믿음이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것을 알기에 바울은 … 그날이 가까와 올 수록 더욱 (모이기를 )그리하자.. 라고 권면하고 있다.
모인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관심을 Share 하자는 얘기다.
이제 교회에서의 예배가 회복되어 가고 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델타> 얘기가 떠 돈다.
또 한번 시험대에 놓일 수가 있다.
기도하며 모이기에 더욱 힘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라며…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