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내가 한국에서 중학생 때 였나보다.
이종사촌 형이 있었다.
이젠 얼굴도 이름도 (종구형이었던 걸로) 가물가물하지만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다.
내가 그때 살던 대전집은 한옥이었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운데 작은 정원이 있고 오른쪽으론 우물이 보이고 그 옆엔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대를 조금 지나면 조그마한 지하실이 있었는데… 과일이나 상하지 않아야 할 음식들을 그곳에 저장하곤 하던 곳이다.
찌는 여름에도 제법 서늘한 지하실 이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부억과 목욕실 (?) 이 있었고 (그냥 큰 공간에 물을 담아두고 요리할때나 혹은 여름철 더울때 등목도 하던 곳이다) 그 왼쪽으론 대청 마루가 있고 방들이 있었다.
방들 중간에 놓인 제법 큼지막한 대청 마루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전용공간이었는데 뒷쪽 (화장실과
창고) 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 놓으면 앞쪽과 바람이 시원하게 통하기에 여름철 오후가 되면 다들 대청에
누워 매엠매엠~ 매미소리 들으며 낮잠을 자던 곳이다.
하루는 집안에 식구들이 없어서 대청에 일자로 손과
다리를 뻗고 오수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꿈결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다시 잠이 들었는데 그 소리가 또 들리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들어 보니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는데 왕왕~ 되는 효과음 (?) 까지 들리기에 꿈속에서 들리는 줄 알았던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몇번 정신을 집중하고 들어보니…
“ 감사하옵나이다… 정말 정말 감사하옵나이다” 라고 누가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궁굼해서 벌떡 일어나 소리나는 곳을 찾아보니… ㅎㅎ 바로 지하실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누가 지하실에 있지?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다.
분명히 지하실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감사하옵나이다… 정말 정말 감사하옵나이다”
그떄 내가 교회에 나갔었다면 누군가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는데 그게 아니었다.
살며시 지하실 입구에 가서 내려다 보니 어두운
곳에 누군가가 중앙에 서서 제스쳐를 써 가며 소리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누.. 누구예요?
잠시 소리가 멈추더니 이내…
네 이놈~ 감히 무엄하도다!
라고 받아친다.
그는 다름아닌 나의 이종사촌형 종구형이었다.
상황을 얘기해 보자면… 종구형은 그 당시 대학생이었고 전공은 불문학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연기자.배우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 그를 이모님이 흔쾌히 그러라고 내버려두지는
당연히 않았다.
갖은 핍박 (?) 과 협박 (?) 을 받으면서도 종구형은 연기에 대한 꿈을 져버리지 않았고 드디어 드디어.. 어느 영화속의
한 장면 단 한 장면 그리고 단 한마디 대사가 있는 그 배역을 땃다는 것이다.
사극이었는데…
어찌저찌 … 훈련중에 배가 고파 병사들과 헛간을 뒤지다가.. 헛간에서 어느 여자와 밀애를 나누던
대감댁 아들이 놀라서 나오며 그 거북한 상황을 무마하려고… 돈 몇푼을 던져주며 가서 국밥이라도 사먹으라는
장면에서… 바로 이 종구형이 (아마도 병사 2 또는 병사 3 정도 되었을 것이다) 얼굴을 땅바닦에 닿을 정도로 굽신거리며 감사와 기쁨의 고함을 치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단 한마디 대사가 바로 “감사하옵나이다… 정말 정말 감사하옵나이다” 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를 지하실에서 연습하면… 웅웅~ 하는 음향효과 때문에 더 실감이 난다고 했다.
나를 데리고 대청에 올라가서.. 연기에 대한 연설을 시작하면서 종구형은.. 연기자가 얼마나 좋은 직업인줄 아냐… 그렇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도… 왕도 되어보고 거지도 되어보고 깡패도 되어보고 사장도 되어보고 살인자도 되어보고.. 돈도 벌고 스트레스도 풀고… 이름도 날리고 마음대로 소리도 질러보고… 이 얼마나 좋은 직업이냐…. 라고 그 어린 중학생 나를 앉쳐놓고 거의 한시간 넘게
연설을 하였던 …. 그떄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다.
결국 그 형은 연기자가 되지 못하고 내가 듣기로는
회사다니면서 연극동아리에 가입하여 아마츄어 연극을 계속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때의 그 명 연설을 내가 들어서일까?
그때의 그 설득력에 감복해서일까?
나도 한 때는 연기자에 대한 관심이 꽤 있었다.
끼가 있기는 했는데 아마도그 방법을 잘 몰랐고
사회생활을 하기 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온 관계로 그럴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어디가나 끼는 잠복해 있다가 적당한 기회가 되면
삐져 나오는가 보다.
교회계통으로 연극.뮤지컬 등에 발을 들이게 되고, 어느 해 인가 한인 이민 … 80주년 (?) 을 기념하기 위해 남가주 교회 연합으로 뮤지컬 <아 골고다> 공연을 위한 오디션을 한다는 공고가 났다.
마음속에 항시 남아있던 그 관심때문인지 오디션에
참가했다.
총감독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배우 장나라씨의 아버지인, 연극인 탤랜트 연출가로 유명한 주호성씨가 한국에서
연출을 맡아 이미 미국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스케줄에 의하면 오디션을 마치고 배역이 정해지면 3개월의 훈련을 거쳐 그해 가을에 윌셔 이벨 극장인지
스카티쉬 오디토리움인지 (잘 기억이 안난다) 에서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 골고다> 의 내용은 예수님이 배반당하고 잡히고 돌아가시는 그 시퀀스 이밴트를 뮤지컬로 표현해 내는 것이었다.
오디션을 볼때는 어느 배역에 지망을 하는지 말
해야 한다.
나는 생각해둔 배역이 <베드로> 였다.
제법 굵직한 배역인데…. 이왕하려면 떨어지더라도 주연급을 맡아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
예전의 종구형처럼… “감사하옵나이다… 정말 정말 감사하옵나이다” 이 한마디 외치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지는 않았기 떄문이다. ㅎㅎㅎ
연출가 선생님이 이것저것 네레이션/발성/톤/제스쳐 등등을 테스트 해 보시더니만 … 당신은 베드로 역이 아니라… <빌라도> 역을 맡아야 겠다고 했다.
목소리 톤과 체격과 풍기는 인상이 빌라도 제격이라고
엄지척을 한다.
하필 왜 악역인가…. 잠시 생각이 들었지만… 예전부터 지독한 악역을 해 보고싶었는데… 종구형 말대로… 평생 못 해볼 그 본디오 빌라도 역을 해 보자…. 라고 결심하고 드디어… 본격적인 뮤지컬 연습에 들어갔다.
뮤지컬 곡은 그때 서울대 작곡가를 나오시고 합창분야의
전문가이신 작곡가가 전 곡을 이미 작곡 해 놓은 상태였다.
나도 솔로 한곡이 있었고… 물론 합창곡의 코러스도 도와야 했고… 곡 연습만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할리우드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전곡을 녹음을
했다.
당연히 공연시는 립싱크가 아닌 라이브였지만… 연습을 위해서 그리고 혹시 그날 솔로이스트들의 컨디션이 최악상황일때를 대비하여.. 녹음을 한 것이다.
3개월 후.. 공연이 있었다.
청중은 남가주에 있는 (거의 ) 모든 교회에서 광고를 한 덕분인지… 1000 석 (or more?) 이 훨씬 넘는 자리가 꽉 차 버렸다.
조명이 위 아래 그리고 저 멀리서 쏱아지고 음악이
꽝꽝 나오고… 멋지게 만들어진
무대위로… 근 한시간 분장을 한 연기자들의…뮤지컬 연기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무대에 나가 연기하기 바로 직전까지는 … 말 그대로 죽음 상태이다.
겁나고 떨리고 두렵다.
그러나 일단 무대위에 올라가서 어둡던 주위가 조명으로
스폿이 되고 음악이 흐르면.. 어떤 생각이
나느냐면…. 이제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제 돌아갈 순 없다…. 모든걸 맡기고 리얼하게 극중의 내가 되어 나를 보여주자… 라는 은근한 자신감이 든다.
나도 배웠듯이… 청중을 향해 눈을 내려깔고… 마치 유치원생들 앞에서 선생님이 먼가를 시범으로 보여주듯 자신만만하게 오만하게 거만하게 행동하자.. 그것으로 일발장전은 끝난 것이다.
근 1시간 45분 정도의 뮤지컬 이었는데 …많은 배역자들이 한국에서 뮤지컬이나 연극을 하시던 분들이었고… 아닌 분들도 각자 나름대로 이 분야에서 사역을 하였거나 관심이 지극한 사람들이었기에… 큰 실수없이 잘 진행되었던 걸로 기억된다.
가롯유다 역할을 맡은 한 형제는…. 항상 기도를 하였다.
뜻과는 다른 그 비열한 역할을 연기하면서 마음으로
큰 짐이 되었나 보다.
결국 중간쯤 자기 역을 한 다음 무대뒤로 돌아와…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건만 .. 바닦에 주져앉아 펑펑 울기 까지 했다.
내 역할에 충실하고 빠져들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이 연기다.
내가 거만하게 그러나 권위있게 대사를 하고 … 무대가 어두워 지고 나의 솔로를 위해 조명이 스폿으로 쪼이고 포그로 효과가 무대위로 깔릴때… 부르는 그 빌라도의 고뇌에 찬 그 솔로곡은…
내가 부르는 것인지 정말 빌라도가 부르는 것인지… 내가 나인지 빌라도인지… 잠깐 혼동될 때가 있었다.
연기생활 3-40년 넘은 연기자들이.. 연기에 빠져 배역자의 행동을 공연이 끝나고도 얼마간 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이해 할 것 같다.
그 맛에 빠져… 교회에서도 미니 뮤지컬과 연극을 정기적으로 연출해
보기도 하였다.
주체할 수 없이 솟구치는 그 끼를 발산할 때가
없는 젊은이들… 마음속 깊히 관심과 호기심은 있지만 그럴 기회가 없어 숨기고 지내왔던 사람들… 예전에 돌탕 (돌아온 탕자) 이라는 30분짜리 영화를 만들어 보았다.
평소에 조용하고 얌전하든 분이 그렇게 와일드 해
지는 것을 처음 보았다.
조신하던 그 여집사님이 주인공의 방탕하는 그 씬에서그렇게
세속 (?) 적으로 연기하는것도 처음 보았다.
얼마나 표출 하고 싶었단 말인가… ㅎㅎㅎ
내가 무슨 연기를 해..?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그러나 미련한 곰도 훈련시키면 댄스를 한다.
만물의 영장 ㅎㅎㅎ 사람인데 ..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
시켜주면 무엇이든 다 한다.
가르쳐 주면 얼마든지 다 잘한다.
우리 인생도 무대위에서의 연기이다.
작가이신 하나님이 극본을 쓰시고, 연출가이신 성령님이 연출하시고,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공으로 연기자들을 리드하신다.
내가 조연으로… 이 땅에서… 이 여정속에서.. 이 배역을 맡았으니… 성실하게 잘 해야 될 것 아닌가.
내 맘에 안드는 배역이라고 집어 치우면… 연출자가 다시는 쓰시겠는가?
작가 하나님이 나만을 위하여 극본을 다시 쓰시지는
않는다.
주연인 예수님이 조연맡은 나를 위해 모든걸 바꾸실
수는 없다.
악역은 악역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코메디는 코메디로 ..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작가선생님의 머리에서 그 의미가 연기 스크립트로
씌여졌기 떄문이다.
그것이 인생이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그날의 그 무대를 생각하면.. 이 나이에도 무언가가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낀다.
소중하고 귀중한 경험이다.
그런데…
나의 인생이 다 끝났을때…
이상하게도..
나는 다음의 대사를 외칠 것 같은 느낌이다.
“감사하옵나이다… 정말 정말 감사하옵나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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