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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시간의 나그네들 5 — 다곤 신전: 머리카락에 묶인 힘 2025-12-27 10:20
작성자 Level 10

CHAPTER 5 — 다곤 신전: 머리카락에 묶인

이번에는 바람이 아니라 진동이었다. 땅이 낮게 울렸고, 마치 거대한 짐승이 숨을 고르는 듯한 둔탁한 떨림이 발밑에서 전해졌다.

철수가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
이번엔조용한 시대는 아니네.”

주변은 거칠고, 무질서했고, 공기 자체가 폭력적이었다. 부서진 돌담, 불에 그을린 나무,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들판.

동일이 성경을 펼쳤다. 이미 페이지는 열려 있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동일이 낮게 말했다.
사사기삼손이야.”

철수는 SIMON 켰다. 화면에는 붉은 하나가 미친 듯이 깜박이고 있었다.

TARGET: SAMSON
STATUS: UNSTABLE
POWER LEVEL: EXTREME

상태가불안정?”
철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동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능력은 넘치는데, 삶은 무너져 있는 사람이지.”

그때 멀리서 포효가 들려왔다. 짐승의 울음이 아니라, 사람의 .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소리.

그리고철수는 포효 뒤에 붙은낯선 숨결 느꼈다. 누군가가 숨을 들이마셨다가, 숨을 삼손의 분노 속으로 내뿜는 같은 느낌.

동일아.”
?”
여기 따라왔어.”
철수는 말끝을 흐렸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동일은 알아들었다.

동일은 눈을 감고 짧게 기도했다.
주님이번에도 우리를 지켜주소서.”

 

그들은 포도원 근처에서 처음으로 삼손을 보았다. 거대한 체구. 근육은 마치 돌을 깎아 만든 것처럼 단단했고, 눈에는 분노와 장난기, 그리고 깊은 공허가 동시에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기이할 정도로 길고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 움직이는 같았다.

순간. 사자 마리가 덤불을 찢고 뛰어나왔다. 삼손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다.
으흐흐흐~ 재밌겠군.”

사자가 그의 목을 노려 뛰어들자, 삼손은 맨손으로 입을 찢어버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피가 튀었다. 철수는 숨을 들이켰다.
“…
.”

동일도 말을 잃었다.
이건축복과 저주의 경계에 힘이야.”

삼손은 사자의 시체를 발로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감당할 없는 어디까지 갈까.”

말이 공중에 매달린 흔들릴 , 철수는 삼손의 어깨 너머로 검은 기운이 잠깐 걸터앉는 것을 봤다.

어디까지 갈까?’
질문은 원래 하나님께 던져야 하는 질문인데, 검은 존재는 질문을자기에게돌렸다.

어디까지든 있어. 선택된 괴물이다. 그러니 누구도 너를 막지 못한다.’

삼손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웃음은 자유가 아니라, 오만의 시작 같은 웃음이었다.

동일이 낮게 속삭였다.
철수야저건 단순한 유혹이 아니야. 힘이소명 떠나면, 그때부터 힘은 주인이 .”

철수는 삼손의 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내가 만들던 기술도, 그럴 있겠지.”

 

시간은 빨리 흘렀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결혼 잔치에서 수수께끼를 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것이 나왔다.”

철수는 동일에게 속삭였다.
사자 이야기잖아.”

삼손은자기 인생을 전부 농담처럼 써버리는 타입이야.”
동일이 답했다.

수수께끼는 배신으로 풀렸고, 삼손의 분노는 폭발했다. 그가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꼬리에 횃불을 묶을 , 철수는 이상하게도불길보다 먼저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동일 지역 바람 방향이 이상해.”
?”

정확히 블레셋 주요 저장고 쪽으로만 불이 번져.”

동일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처음 지역에 떨어질 , 대기압이 조금 흔들렸어.
SIMON
주변 지형 데이터를 미세하게 교란했어.”

, 삼손의 분노는 폭발했지만, 불길이 최대 효과를 데에는 철수의 기기가 남긴 보이지 않는 흔적이 있었다. 그런데이번엔 가지가 있었다.

불길이 치솟는 저편, 검은 존재가바람을 타는것처럼 있었다.

그는 불을 만든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불이 가장 번질 곳을 알고 있었고, 삼손의 분노를 그쪽으로 살짝 밀어준 것이다.

그래, 태워라.
분노로 사명을 대신해라. 그러면 힘은 결국 너를 먹는다.’

동일은 조용히 말했다.
하나님은삼손의 충동조차 역사 속에서 쓰시지만…”
그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
검은 자는, 충동이 삼손을으로 끌고 가길 원해.”

 

그러나 삼손의 가장 적은 블레셋도, 사자도 아니었다.

델릴라.

그녀의 눈빛에는 사랑과 탐욕이 정교하게 섞여 있었다.

철수는 처음 그녀를 보자마자 말했다.
여인위험해.”

동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손이 가장 약한 지점이야. 힘의 근원이 아니라, 정체성.”

델릴라는 삼손의 무릎에 머리를 얹고 속삭였다.
당신의 힘의 비밀을 알려줘요.”

삼손은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 밧줄, 머리카락….

그러나 거짓말이 반복될수록 진실은 가까워졌다.

여기서 철수는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SIMON기기를 조작해 델릴라의 주변 음향을 교란했다. 결과 삼손은 결정적인 말을 번은 삼켜버렸다.
힘의 비밀은…”

그때였다.

델릴라의 방문이 아주 살짝 열리며 밖의 어둠이 줄기 들어왔다. 철수는 어둠을빛의 부재 느끼지 않았다. 그건 마치 의도를 가진 그림자 같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델릴라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나 속삭임은 말이 아니었다. 감정이었다.

돈을 잃는 공포, 권력을 놓치는 불안, 남자를 꺾고 싶어하는 자존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할 있는명분델릴라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은 숨기잖아요.”

동일이 이를 악물었다.
저건연기가 아니야. 누가 감정을 증폭시키고 있어.”

철수가 SIMON 화면을 확인했다. 주변 대기 성분이 순간적으로 출렁이며, 기기의 센서가 짧은 노이즈를 띄웠다.

UNIDENTIFIED INTERFERENCE…

철수의 얼굴이 굳었다.
간섭이 들어왔다.”

델릴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눈물, 비난, 사랑을 가장한 조롱.

동일은 낮게 말했다.
철수야이번엔막을 없는 같아.”

철수는 고개를 숙였다.
이건삼손이 직접 겪어야 실패야.”

마침내 삼손은 말했다.
머리에면도칼이 닿으면 힘이 떠난다.”

동일은 눈을 감았다. 주님

머리카락이 잘렸다.

삼손의 눈이 순간 비었다. 그는 이내 일어섰지만 아무 힘도 없었다. 블레셋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눈이 뽑혔고, 쇠사슬이 채워졌다.

철수는 주먹을 쥐었다.
이걸지켜봐야 한다고?”

동일은 낮게 말했다.
십자가 앞에서도우린 아마 같은 질문을 ?”

그때, 철수는 확신했다. 모든 장면의 뒤에, 검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검은 존재는 삼손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잔인하게, 삼손을 조롱거리로 살아남게하고 싶어했다. 사명을 비웃기 위해서.

 

시간이 흘렀다.

삼손은 맷돌을 돌리며 감옥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삼손은 조금씩 자라나는 머리카락과 함께 느껴지는 힘을 시험해 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기력한 패배자인양 고개를 떨구고 견뎠다.

철수는 SIMON 보며 중얼거렸다.
재생 속도비정상적으로 빠른데?”

동일은 삼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근육의 문제가 아니야. 소명은 잘려도다시 자라거든.”

말이 끝나자, 감옥 바닥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횃불이 흔들렸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검은 존재가그림자 형태로 있었다.

자라라.
하지만 소명으로 자라지 마라.
복수로 자라라.
그러면 너는 마지막까지 나의 도구다.’

동일은 기운을 느끼고 낮게 중얼거렸다.
주님마지막 순간, 그가복수 아니라사명 붙들게 주세요.”

철수도 따라 기도했다. 기도는 어색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입술에서 멈추지 않았다.

 

블레셋은 삼손을 조롱하기 위해 다곤 신전으로 끌어냈다. 수천 명의 군중. 기둥 위에는 귀족과 제사장들이 가득했다.

여기서 철수는 처음으로 이상함을 정확히 포착했다. 이건 단순한 축제가 아니었다. 군중의 흥분이 비정상적으로 맞춰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사람들의 광기를 방향으로 조율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였다. 철수가 군중 사이에서, 아주 잠깐검은 망토 같은 실루엣을 보았다.

실루엣은 웃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보다 조용하고, 깊은 웃음.

동일아…”
철수가 이를 악물었다.
저놈, 장면을 끝으로 만들려고 한다.”

삼손은 소년의 손을 잡고 말했다.
기둥을만져보게 해다오.”

철수는 순간 심장이 멎는 알았다.

SIMON 화면에 신전 구조가 3차원으로 펼쳐졌다.
동일 건물, 하중 분산 구조가 아니야.”
무슨 말이야?”
중앙 기둥이 전부를 떠받치고 있어.”

철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떨며 SIMON 보조 장치를 꺼냈다.
삼손의 힘만으로도 가능하겠지만 장치로 미세 진동을 넣으면…”

동일은 즉시 알아들었다.
결정적인 순간에만.”

순간, 검은 존재가 군중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속삭임이 군중의 입을 빌려 터져 나왔다.

웃어라!”
괴물을 봐라!”
신이 이겼다! 다곤이 이겼다!”

환호 속에서, 검은 존재는 삼손의 가슴에 마지막 쐐기를 박으려 했다.

봐라. 너는 하나님의 영웅이 아니다.
너는 구경거리다. 그러니 복수로 끝내라. 증오로 끝내라.’

삼손은 기둥 사이에 섰다.
그는 눈이 없었지만,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보였다.

그가 낮게 말했다.
여호와여…”

순간, 동일이 삼손 바로 뒤에서 기도했다.
주님이건 복수가 아니라 마지막 사명입니다.”

철수는 SIMON 버튼 위에 손을 얹었다. 삼손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만다시 힘을 주옵소서.  어리석음을 만회할 기회를…”

기도는복수 아니었다. 기도는회개였다.

그리고 회개가 올라가는 순간, 군중 위에서 웃고 있던 검은 존재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는 계획을 바꿔야 했다. 이대로면, 삼손이 증오가 아니라 사명으로 끝난다.

검은 존재는 마지막 발악으로 철수의 SIMON 간섭을 넣었다. 철수의 화면이 꺼졌다 켜졌다. 손끝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철수는 이미 배웠다. 기기는 흔들릴 있다. 그러나 결단은 흔들리지 않는다.

철수는 화면이 돌아오자마자, 낮은 레벨로,   결정적인 순간에만 들어가도록 공진 주파수 값을 미세 조정했다.

지금이다.”

삼손이 기둥을 밀었다.

순간 철수는 공진 주파수를 작동시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동이 기둥 내부를 흔들었다. 삼손의 근육이 미친 듯이 부풀어 올랐다.

으아아아아아!!!”

콰콰 —!!!

기둥이 갈라졌다. 돌이 울부짖듯 부서졌고,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비명.
먼지.
암흑.

다곤 신전은 삼손의 몸과 함께 역사 속으로 무너졌다.

찰나, 철수는 무너지는 먼지 속에서 검은 존재가 뒷걸음질 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무너지는 돌에 깔리는 아니었다.

그는… ‘사명으로 완성되는 죽음앞에서 스스로 물러나고 있었다.

 

침묵.

먼지가 가라앉았을 ,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삼손은 죽었고, 블레셋의 권력도 함께 사라졌다.

철수는 무릎을 꿇었다.
이건영웅담이 아니야.”

동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극이지. 그러나하나님은 비극 속에서도 역사를 전진시키신다.”

철수는 무너진 기둥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삼손은끝까지 망가진 사람이었을까?”

동일은 조용히 대답했다.
아니. 끝까지 쓰임 받은 사람이었지. 마지막에 그는 증명하려 아니라
하나님 붙들었으니까.”

그때, 철수는 어둠 저편에서 다시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검은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잠시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마치 다음 무대를 준비하듯. 정체불명의 책이 천천히 빛났다.


NEXT: —

아직 다음 목적지는 표시되지 않았다.

철수는 마지막으로 무너진 신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거의 자신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이제 알겠어. 검은 놈은 역사를 바꾸니까 집요한 거야.
과정을 망가뜨려서사람을 무너뜨리려고.”

동일이 철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오늘 봤잖아. 회개 하나가, 계획 하나를 뒤집는 .”

말이 끝나자 갑자기 소용돌이 같은 빛이 철수와 동일을 감싸면서 그들은 시간의 회오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철수는 마지막으로 봤다.

먼지 , 어둠의 끝에서 검은 존재가 그들을다음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을. 손짓은 조용했지만 분명했다.

다음은네가 가장 약해지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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