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여리고: 붉은 줄과 무너지는 성
먼저 들려온 것은, 북소리가 아니라, 나팔 소리였다.
쉭— 하는 공기를 가르는 날숨 같은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어… 여긴 또…”
철수가 눈을 떴을 때, 발밑에는 모래가 아니라 단단히 다져진 흙과 갈이 섞인 평지가 있었다.
멀리 푸른 바다는 없고, 대신 언덕 너머로 거대한 돌벽의 실루엣이 우뚝 솟아 있었다.
“성벽…”
정동일이 곁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저거… 아무리 봐도… 여리고다.”
성벽은 생각보다 더 높았다. 철수가 역사책에서 보던 상상도보다도 훨씬 두껍고 위압적이었다.
해는 낮게 떠 있었고, 뜨거운 공기 사이로 성 위를 순찰하는 군사들의 모습이 점처럼 오르내렸다.
철수는 반사적으로 SIMON를 꺼냈다. 파란 불빛이 켜지며, 이번에는 넓은 평지 한가운데 커다란 원형 구조물이 표시되었다. 그 원을 둘러싼 여러 개의 작은 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화면 상단에 깜빡이는 글자.
TARGET:
JERICHO / JOSHUA 2 & 6
“정확하네.”
철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여리고… 정탐과 함락, 둘 다 포함인 모양이다.”
“그럼…”
동일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우리가… 이번엔, ‘그 집’ 에도 들어가겠네.”
철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 집’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라합의 집.
성벽 위, 창에 붉은 줄이 달리게 될 그곳.
그때.
철수의 시야 한구석이 이상하게 어두워졌다. 해가 가려진 것도 아닌데, 공기 자체가 검게 눌린 듯했다. 언덕 위, 여리고 성벽 그림자와는 전혀 다른 ‘움직이는 검은 덩어리’가 잠깐 서성였다.
비 오는 고속도로 커브에서, 번개가 내려치기 직전… 그들이 스쳐 보았던 그 시커먼 물체.
철수의 손끝이 순간 얼어붙었다.
“동일아…”
“왜?”
“저기… 방금…”
하지만 동일이 고개를 돌릴 때, 언덕 위에는 바람만 지나가고 있었다.
사라졌다. 항상 그랬듯, “보이게 했다가” “안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동일은 억지로 웃었다.
“피곤해서 그래. 여기 공기… 뭔가 압도적이잖아.”
철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피곤이 아니라, 누군가가 따라온다는 감각이었다.
둘은 언덕을 내려와 넓은 평지를 가로질렀다. 멀지 않은 곳에 텐트와 장막들이 모여 있는 이스라엘 진영이 보였다. 그들은 ‘정탐’ 파트에 개입하기 위해 일부러 군사들 가까이 섞였다.
그런데 진영에 들어서자마자, 예상치 못한 소문이 이미 돌고 있었다.
“여리고가 수상하다.”
“성문에서 낯선 얼굴을 봤대.”
“정탐꾼이 들어갔을 거야.”
철수는 SIMON으로 성벽 주변 열점을 확인했다. 그리고 즉시 알아챘다.
“이상해.”
“뭐가?”
“정탐꾼이 아직 움직이기 전인데… 성 안 경계가 이미 올라가 있어.”
동일의 얼굴이 굳었다.
“성경엔 왕이 정탐꾼 얘길 듣고 라합 집으로 사람을 보내잖아. 그런데… 너무 빠른데?”
철수는 언덕 위를 다시 본능적으로 올려다봤다. 그 검은 덩어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여리고 왕의 귀에 먼저 속삭인 것처럼 상황이 미리 던져져 있었다.
그들의 첫 방해는 늘 이런 식이었다. 칼을 직접 들지 않고, 사람 마음을 먼저 건드린다. 의심, 공포, 과잉 경계… 그 감정들로 역사를 흔든다.
“멈춰라! 누구냐!”
동일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같이 보게 된 자들입니다.”
군사 중 한 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투… 히브리 사람 같기도 하고…”
“우린… 좀 복잡한 사람들입니다.”
철수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군사들이 서로 눈을 맞추더니, 누군가가 말했다.
“저 두 사람, 여호수아에게 데려가 보자. 요즘 이상한 일들이 많으니,
이상한 나그네도 한둘이 아니군.”
잠시 후,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지도자 앞에 서 있었다.
여호수아는 예전보다 더 늙어 보였다. 홍해 앞에서 봤던 모세의 고독과 책임이 이제는 이 사람의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의 앞에는 간단한 지형도가 펴져 있었다. 돌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그리고 그 바깥으로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 군사들의 위치. 여호수아는 두 사람을 위에서 아래까지 훑어보았다.
“이상한 나그네들이란 말은… 언제나 긴장을 하게 만드는군.”
그가 낮게 말했다.
“이전 광야에서, 애굽 군대를 혼란시키는 데 도움이 된… 그 나그네들이 너희냐?”
철수와 동일은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혹시…”
동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광야에서… 우리가 조금 도왔던… 그 일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습니까?”
여호수아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애굽군이 갑자기 우회로로 빠져 헤매고, 그 사이 우리가 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일.
요즘도 군사들이 술자리에서 이야기한다.”
그는 두 사람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너희가… 누군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여시는 동안,
이상한 나그네들이 곁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철수가 여호수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냈다.
“지금도… 여호와께서 하실 일을 위해, 우린… 그냥 도구로 서 있으면 됩니다.”
여호수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도시 안으로 정탐을 보내려 한다.”
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수문 구조, 군사 배치, 성 안의 사기와 분위기…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그는 이마를 짚었다.
“우리에겐 익숙한 길들만 알고 있다.
이상한 나그네, 너희에겐… 다른 눈이 있는 것 같군.”
여호수아의 시선이 철수의 손에 들린 작은 검은 기기로 향했다. 철수는 반사적으로 그 기기를 숨기려다, 곧 동작을 멈추었다.
숨기는 것도, 이제 한계가 있겠지.
“안에 들어갈 정탐 두 명과…”
여호수아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너희 둘도 함께 가라.”
동일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성 안으로… 직접 들어가라고요?”
“그래.”
여호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가진 정보보다, 너희의 눈과 귀가 더 멀리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텐트 뒤편에 서 있던 두 사람을 손짓해 불렀다.
“살몬.”
앞으로 걸어나온 젊은 장수가 있었다. 탄탄한 체격, 단단한 턱, 그리고 꽤 또렷한 눈매.
“이 사람은 살몬이다.”
여호수아가 소개했다.
“정탐을 맡길 만한 자다. 또 하나, 그의 동행이 있을 것이다.”
살몬의 옆에 조금 더 왜소하지만 민첩하게 생긴 또 한 사람이 나왔다. 두 눈이 매처럼 날카롭고, 움직임이 재빠른 남자.
“우리는 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살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낯선 나그네들도 함께라면, 저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 의심이 담겨 있었지만, 여호수아의 신뢰를 의식하여 말투를 낮추고 있었다.
여호수아는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도시 안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를 통해 길이 열릴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동일의 등골이 서늘했다.
그가...
이미 알고 있다.
라합을.
여리고 성은 밤이 되자 더 무서워 보였다. 성벽 위에는 횃불이 줄지어 꽂혀 있었고, 군사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순찰을 돌았다.
성벽 아래 그늘진 곳에서, 살몬과 그 일행은 낮은 목소리로 마지막 확인을 하고 있었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모두 닫혀 있다.”
살몬이 말했다.
“하지만, 성벽에는 사람들이 사는 집들도 있고, 곳곳에 작은 통로가 있다.”
그는 손가락으로 성벽의 한쪽 부분을 가리켰다.
“저쪽 구간에는, 낯선 사람들을 가끔 받아들인다는 집이 있다.
객점에 가까운 곳이지.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면… 아마 그쪽일 것이다.”
동일의 가슴이 다시 한 번 철렁 내려앉았다.
그 집…
철수는 SIMON를 켜고 성 주변의 지형을 확인했다. 벽의 두께, 외곽 경비 루트, 순찰대가 도는 시간 간격.
“지금이 좋아요.”
철수가 말했다.
“저쪽 북쪽 측면 순찰대가 돌아가면, 여기서부터 저 지점까지 8분 정도 공백이 생깁니다. 그 사이에 벽을 타고 올라가야 해요.”
살몬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아느냐?”
철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에겐… 좀 특이한 눈이 있습니다.”
살몬은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질문보다 시간이 더 중요했다.
“좋다.”
그가 칼을 고쳐 쥐었다.
“10분 안에 끝내자.”
네 사람은 그림자처럼 성벽 아래로 접근했다. 벽에는 돌 사이사이에 사람 손만 겨우 들어갈 만한 틈들이 있었다. 살몬과 그의 동료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그 틈을 이용해 올라갔다.
철수와 동일도 뒤를 따랐다. 철수는 체력적으로 꽤 힘들었지만, 손과 발이 기억하는 ‘군대 시절 유격훈련’을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회사에서 회식때마다 왕년에 군대에서 활약(?) 하던
무용담만 지껄였는데 오늘 이렇게 실전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나이에… 이런 걸 다시 하게 될 줄이야.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즈음, 성벽 위의 평평한 바닥이 손에 닿았다.
네 사람은 조용히 몸을 지탱하며 성 안쪽으로 몸을 굴렸다.
“저기다.”
살몬이 속삭였다.
성벽 안쪽으로 붙어 있는 집들 중 하나. 창문에는 얇은 천이 드리워져 있었고, 천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남자들의 웃음소리, 잔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여인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함께 들려 왔다. 동일은 잠시 숨을 멈췄다.
라합…
살몬이 다른 정탐에게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사람들의 눈을 끌어. 나와 저 둘은 뒤에서 움직이지.”
살몬의 동료가 재빨리 벽을 타고 내려갔다. 조금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요?”
“여인아,
우리는 타지에서 온 나그네들이다. 하룻밤만 몸을 누일 곳을 찾고 있다.”
잠시의 침묵 끝에, 문이 삐걱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돈만 제대로 내면, 나그네도 환영이죠.”
여인의 목소리는 강인하면서도 어딘가 지친 음색이었다.
그때, 살몬이 철수와 동일에게 눈짓했다.
“지금이다.”
세 사람은 조용히 벽을 따라 집 옆 창문까지 이동했다. 살몬이 먼저 손으로 창틀을 잡고 몸을 내렸다. 철수와 동일도 뒤를 이어 천천히 내려갔다.
창 아래에는 좁은 골목길이 있었고, 거기에서 집 안쪽으로 난 작은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살몬이 그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안쪽은 어두웠고,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여인의 목소리였다. 네 사람은 숨을 죽이며 그 방으로 들어갔다.
촛불 하나가 어렴풋이 방 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천으로 둘러진 공간, 낡은 침상, 그리고 벽 한쪽엔 밧줄과 곡식자루들이 쌓여 있었다.
촛불 곁에 서 있는 여인이 그들을 바라봤다. 크게 꾸민 흔한 기생의 모습은 아니었다. 단단한 눈매, 거친 손, 그러나 그 눈동자에는 무언가 깊은 슬픔과 결심이 동시에 떠 있었다.
“여기가… 그 여인의 집인가…”
동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라합.
살몬이 입을 열었다.
“여인아,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라합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소문으로만 들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홍해를 가르고, 애굽 군대를 모두 물에 빠뜨렸다는 그 하나님의 백성…”
라합은 네 사람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당신들… 여기 들어오는 거, 그리 쉽지 않았겠네요.”
“우리도 그 정도는 안다.”
살몬이 낮게 말했다.
“이 도시의 군사들은 예민하다. 문이 닫힌 후에 들어온 낯선 사람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라합은 잠시 그 말에 침묵했다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럼… 당신들이 내 집을 찾은 건, 단지 쉬러 온 게 아니겠네요.”
정탐꾼의 눈과 라합의 눈이 서로를 꿰뚫었다. 라합의 눈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 사이로, 누군가의 속삭임이 그녀의 마음을 건드렸다.
‘배신해. 살아야지. 너는 어차피 버림받은 사람.
너 혼자 살면 되잖아.’
라합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집 안의 공기가 조금 밝아졌다.
그때, 동일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라합.”
그가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라합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죠?”
동일은 대답 대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나님이… 당신을 알고 계시니까요.”
그 말에 라합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문득, 집 바깥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거칠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군사들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라!
왕의 명이 내려왔다!”
라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벌써…?”
살몬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걸렸나…”
동일이 라합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
“라합, 지금 결단해야 해요. 당신이 우리를 숨겼다고 말하면 끝이에요.”
라합의 목이 떨렸다. 바로 그때, 라합의 눈동자가 문 쪽으로 흔들릴 때마다, 철수는 문틈에 검은 실 같은 것이 스며드는 느낌을 봤다.
그 존재는 라합에게 마지막 한 방을 던졌다.
‘너는 이미 더럽혀졌어. 네가 거짓말하면 너희 하나님도 널 버릴 거야.’
라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동일이 라합 앞에 무릎을 꿇듯 낮게 말했다.
“라합, 들어요.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만 쓰시는 분이 아니에요.
지금, 당신의 선택이… 당신의 집을 살릴 거예요.”
잠시 생각하던 라합은 번개처럼 움직였다.
“다들 이리로!”
그녀는 곡식자루 뒤쪽의 판자를 치웠다. 그 뒤에는 지붕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이 있었다.
“지붕 위에 아마 줄기가 쌓여 있어요. 그 사이에 숨어요. 제가 시간을 벌어볼게요.”
“라합…”
동일이 무심코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제발, 빨리 가요!”
라합의 눈에는 이미 결심이 서 있었다.
네 사람은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는 아마 줄기와 볏단들이 빽빽이 깔려 있었다.
철수가 낮게 중얼거렸다.
“성경… 그대로네…”
“근데, 우리가… 이 안에 끼어 있는 거지.”
동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아마 더미 사이에 몸을 숨겼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조차 들키지 않으려 가슴 깊숙이 숨을 눌러 넣었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의 명이다!
오늘 밤, 이스라엘에서 온 정탐꾼들이 이 성에 들어왔다 한다. 너의 집으로 들어온 것이 보였다는 자가 있었다!”
라합의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고 이어졌다.
“나는… 참으로 많은 나그네를 받습니다.
여기가 어떤 집인지 알면서도, 그들이 오는 걸 막을 순 없잖아요?”
군사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입으로 장난치지 마라. 그들이 어디 갔는지 말해라!”
“이미 이 성문 닫히기 전에 떠났어요.”
라합은 담담하게 말했다.
“해질 녘이었으니, 아마 성 밖으로 나간 후 밤길로 도망쳤을 거예요.”
군사가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이라도 그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길 따라가면 흔적이 남았을 테니!”
서너 명의 발소리가 우르르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직도 집 안에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군사가 있었다.
“라합.”
남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거짓을 말하는지,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볼 것이다.”
“거짓은 아닙니다.”
라합이 답했다.
“제가 들은 것만 말했을 뿐이죠.”
잠시의 정적. 그리고, 군사가 대충 문을 밀치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붕 위의 네 사람은 단 한 줄기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라합의 목소리가 조용히 위로 울려왔다.
“다 갔어요. 내려오세요.”
지붕에서 내려왔을 때, 라합은 촛불 옆에 서 있었다. 방 안은 여전히 좁고 답답했지만, 이제 공기 중엔 묘한 긴장과 기대가 함께 떠돌고 있었다.
살몬이 입을 열었다.
“왜… 우리를 숨겨 주었지?”
라합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듣지 못할 줄 알았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홍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굽에서 어떤 재앙들이 있었는지.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이 어떻게 망했는지. 이 성 안에서도 다 소문이 났어요.”
라합은 손을 쥐었다 폈다.
“사람들은 겉으론 비웃지만, 속으로는 두려워해요.
당신들이 믿는 그 여호와라는 분이… 진짜 ‘신’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네 사람에게 한 번 더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 도시에 속해 있지만, 이 도시의 끝이 어떻게 될지 알 것 같아요.”
그 말은 절망이 아니라, 이상한 희망을 품은 절망 같았다.
동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우리 편에 서기로 했다는 말입니까?”
라합은 잠시 웃었다.
“당신들이 이 성을 치러 온 거, 다 알고 있어요.
내가 왕의 사람들한테 밀고했다면, 당신들은 벌써 잡혀 죽었겠죠.”
그녀는 촛불 위에 손을 잠시 가져가며 열기를 느꼈다.
“내 집을 통해 들어온 사람들을… 오늘 난 죽음에서 건져냈어요.
그러니…”
라합은 손을 가슴에 얹었다.
“당신들의 하나님도… 마지막 날에 나와 내 가족을 죽음에서 건져주실 수 있나요?”
살몬이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 무언가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럴 것이다.”
살몬이 낮게 말했다.
“네가 오늘 행한 대로, 우리의 하나님도 너와 네 집에 행하실 것이다.”
동일이 가볍게 기침을 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라합이 눈을 치켜떴다.
“조건?”
“지금은 이 성벽 위 집이지만…”
동일이 천천히 말했다.
“조만간, 이 성벽이 그대로 서 있지는 않을 겁니다.”
라합의 얼굴에 공포와 기대가 동시에 스쳤다.
“그때, 이 집을 표시할 표적이 하나 필요합니다.
누가 봐도, ‘이 집은 건드리지 말라’는 표시.”
철수가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튼튼한 밧줄이 몇 줄 걸려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다른 것보다 조금 더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염색된 마 줄이었다.
“저 줄.”
철수가 말했다.
“저걸… 창문에 매세요.”
“창문에…?”
“성 밖에서 봤을 때, 누가 봐도 바로 눈에 띄도록. 우리가 들어올 때, 그 줄이 달린 집은,
어떤 일이 있어도 치지 않을 겁니다.”
라합은 잠시 붉은 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이 집이 무너지지 않게 해 준다면, 나와 내 부모, 형제자매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모두 이 집에 모아둘게요.”
살몬이 손을 내밀었다.
“약속이다.”
라합은 그 손을 꽉 잡았다. 그 순간, 동일은 어딘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순간이…
메시아 계보에까지 이어지는 그 연결점이구나.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정탐꾼들은 성 밖으로 나가야 했다.
라합은 지붕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창문가에 붉은 줄을 하나 챙겨온 그녀는 창틀에 줄을 묶기 전, 먼저 밑으로 늘어뜨렸다.
“이 줄을 타고 내려가세요.”
성벽 바깥쪽은 급경사 절벽이었다. 줄이 아니면 내려갈 수 없다. 살몬이 먼저 줄을 잡았다. 잠시 라합을 올려보았다.
“오늘… 네가 우리를 살렸다.”
라합은 짧게 웃었다.
“언젠가… 당신들이 나를 살릴 날도 오겠죠.”
두 사람 사이에 짧지만 단단한 무언가가 오갔다.
살몬이 줄을 타고 내려갔다. 다른 정탐꾼이 뒤를 이었다. 이제 철수와 동일의 차례였다. 동일이 줄을 잡기 전에, 라합이 그를 불렀다.
“아까… 나를 보고 바로 이름을 불렀죠.”
동일이 흠칫했다.
“라합이라고…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동일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우린… 조금 먼 데서 온 나그네들입니다.”
“하나님과… 가깝습니까?”
라합의 질문은 마치 속마음을 찌르는 칼 같았다. 동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여정이 끝나면, 더 가까워질 것 같네요.”
라합이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우리 둘 다.”
동일은 줄을 탄 채로 몸을 내렸다. 발밑이 텅 비어지는 그 느낌 속에서도, 이 대화만큼은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철수의 차례였다.
“너도… 어딘가 멀리서 온 나그네지?”
라합이 물었다.
철수는 말없이 웃었다.
“그래요. 근데… 요즘은, 이 먼 곳들이 하나씩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줄을 잡고 내려가면서, 마지막으로 라합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성벽 위, 어둠 속에서 촛불 하나 옆에 서 있는 여인. 그 옆에 붉은 줄이 드리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억하자.
이 얼굴, 이 집, 이 줄.
며칠 뒤.
여리고 성 앞, 이스라엘 진영에는 이상한 명령이 떨어졌다.
“오늘은 성 앞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라. 입을 다물고, 나팔 소리만 울려라.”
군사들 사이에서 불평이 오갔다.
“이게 무슨 전쟁이냐.”
“성벽을 치지도 않고, 빙빙 도는 게 무슨 전략이야?”
철수는 진영 뒤쪽 언덕에 올라가 SIMON로 전체 행군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심리전이다.”
그가 혼잣말로 말했다.
“심리전?”
동일이 옆에서 물었다.
“성 안 사람들한테는, 이게 더 무서울 수 있어. 언제 공격할지 모르고,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그저 하루 종일, 전쟁터 앞에서 묵묵히 도는 적을 바라보는 거.”
그는 성 안을 상상했다. 이미 정탐 때 봤던 라합의 눈, 군사들의 경계, 시장 사람들의 속삭임.
“말 없이 버티는 상대가 가장 불안한 법이야.”
일주일 동안, 행군은 계속되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점점 피로가 쌓여 갔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이상한 긴장과 믿음도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마지막 날, 일곱 번째 날이 되었다.
“오늘은 성 주위를 일곱 번 돌 것이다.”
여호수아의 목소리가 진영을 울렸다.
‘여섯 번 돌았는데 아무 일도 없잖아.’
‘일곱 번? 소리 지르라고? 이게 전쟁이냐?’
‘너희는 광야에서 이미 미친 거야.’
병사들 사이로, 분명 누군가가 ‘비웃는 목소리’를 흘린다. 철수는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비 오는 고속도로 커브에서 봤던 그 검은 덩어리를 떠올린다.
동일이 군사들에게 외친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 전쟁은 숫자로 이기는 전쟁이 아닙니다!”
철수도, 자신도 모르게 외친다.
“지금 우리가 하는 건… ‘공학’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이상하게, 그 말이 군사들의 가슴을 때린다. 마치 누가 등 뒤를 밀어 준 듯.
곧이어 나팔 소리가 이어졌다. 제사장들이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들고 선두에 섰다.
철수와 동일은 이번에는 군사들 사이에 섞여 함께 돌았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대신, 먼지와 땀과 숨소리를 함께 느끼고 싶었다.
여리고 성 위에서는 이 광경을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사들, 시민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분명 라합도 서 있었을 것이다.
무너지기 직전의 도시.
마지막 날을 맞이한 땅.
일곱 번째 바퀴를 돌았을 때,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사람들의 가슴은 북처럼 두드려지고 있었다.
여호수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소리를 지르라!”
나팔이 울렸다. 천둥 같은 소리였다. 그 위로 사람들의 외침이 겹쳐 올라갔다.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땅이 흔들렸다. 성벽이, 산이 무너지듯 내려앉기 시작했다.
돌이 부서지는 소리, 먼지가 폭발하듯 솟아오르는 장면, 사람들의 비명. 철수와 동일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무너지는 성벽 사이, 바람과 먼지 속에서, 잠깐. 검은 존재가 성벽 위에 서 있다가, 무너지는 돌더미와 함께 찢기듯 흐려진다. 마치 분노하는 것처럼.
SIMON 화면도 난리가 났다. 지형 데이터가 순간적으로 뒤틀리고, 성벽 부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표시되었다. 잠시 후, 먼지구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여리고 성은 더 이상 온전한 성이 아니었다. 거대한 돌더미, 무너진 집들, 도망치는 사람들, 아가는 군사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유난히 무너지지 않은 성벽 일부가 보였다.
“저기…”
동일의 손이 떨렸다.
“철수야, 저기 봐…”
성벽의 일부, 딱 한 구간만 놀랍게도 그대로 서 있었다.그 벽의 창문에, 붉은 줄 하나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붉은 줄. 라합의 집이었다.
“가자!”
철수가 소리쳤다.
두 사람은 돌더미를 넘어 달렸다. 살몬과 일부 군사들도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 집은 치지 마라!”
살몬이 앞장서 외쳤다.
“붉은 줄이 있는 집! 그 안 사람들은 여호와께 바쳐진 자들이다! 칼을 거두어라!”
군사들이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칼을 움켜쥔 채 멈춰섰다. 살몬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라합이 서 있었다. 그 뒤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부모와 형제들, 그들의 자식들까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라합은 살몬을 보자마자 무릎이 꺾이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당신들이…”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정말… 왔군요…”
살몬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약속했으니까.”
그는 라합의 가족들에게 말했다.
“이제 이집은, 이스라엘의 보호 아래 있다. 우리와 함께 간다.”
라합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 맺힌 눈물은 공포와 안도, 그리고 희망이 뒤섞인 것 같았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군사들 틈에 서 있던 두 사람을 향했다.
철수와 동일. 라합의 눈이 조금 커졌다.
“…멀리서 온 나그네들.”
그녀가 입술로만 중얼거렸다. 동일이 미소를 지었다.
“우릴… 기억하나요?”
“어떻게 잊겠어요.”
라합이 답했다.
“내가 오늘 살아 있는 이유 중 일부가 당신들 덕분인데.”
그녀는 붉은 줄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 줄도요.”
철수는 그 붉은 줄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통신 케이블도, 레이저도,
SIMON 안테나도 아닌, 그저 소박한 마 줄 하나. 그러나 이 도시 전체가 무너지는 가운데 한 집을 지키는 표적이 된 줄.
테크놀로지보다,
언약이 더 강하구나.
갑자기 가슴이 묵직해졌다.
“라합.”
동일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섭지는… 않습니까?”
라합은 꽤 오래 생각하듯 침묵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무서워요.
하지만… 이 성이 무너지지 않는 게 더 무서울 것 같기도 해요.”
그 말은 묘하게 마음에 박혔다. 살몬이 손짓했다.
“시간이 없다. 이들을 진영 밖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야 한다.”
군사 몇 명이 라합의 가족들을 호위했다. 라합은 잠시 맨 뒷줄에 서서 한 번 더 무너진 도시를 돌아보았다.
성벽,
먼지,
불길,
비명.
그리고, 기묘하게도 한 구역만 온전한 자신의 집. 라합은 작게,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이 도시가 무너져도, 나와 내 집은… 오늘부터 다른 백성에 속한 거겠죠?”
동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당신은 이제… 여호와의 백성입니다.”
살몬의 눈빛이 그녀 쪽으로 향했다. 그 시선 속에는 이미 단순한 ‘전쟁 중 구조 대상’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철수는 그 눈빛을 보고 미래의 계보 한 줄을 떠올렸다.
살몬과 라합.
그 후손 중에서,
여호와의 메시아가 오겠지.
라합 일행이 먼지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전장 한켠에서 누군가가 써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취하더라…”
해가 기울어 갈 때쯤, 진영은 조용해졌다. 승리의 함성 뒤에는 언제나 피와 침묵이 뒤따랐다.
철수와 동일은 이틀 전 라합과 헤어졌던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도시는 대부분 폐허가 되었고, 멀리 연기만 조금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게 전쟁이네…”
철수가 낮게 말했다.
“승리, 기적, 순종…
그 뒤엔 항상… 이런 장면이 있겠지.”
동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거라고 계속 믿을 수 있을까?”
“적어도…”
철수가 대답했다.
“오늘 붉은 줄이 달린 집 한 채는 안 무너지게 됐으니까. 그건 좋은 거 아니냐?”
동일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일지도 몰라.”
그때, 철수의 가방 안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체불명의 책이 스스로 움직이며 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빛이 새어 나왔다. 이번에는 어딘지 모르게 더 뜨겁고, 더 무거운 느낌의 빛이었다. 페이지 한가운데에 글자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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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RDINATE:
JUDGES 13 / ZORAH AND TIMNAH
동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경을 찾는다.
“소라와 딤나 지역이라면… 그리고 사사기 13절 이라면…”
“삼 … 손???”
동일과 철수가 거의 동시에 외친다.
“드디어 괴력의 나실인 삼손을 보게 될 줄이야~”
두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정체불명의 책에서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졌다. 언덕 위의 바람이 멈춘 듯했고, 눈앞의 폐허가 흐릿해졌다. 동일이 마지막으로 무너진 여리고와, 멀리 어딘가에서 붉은 줄을 떼고 있을 라합을 떠올렸다.
하나님…
이 여인과 그 후손들의 길을
축복해 주세요.
그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빛이 둘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한 번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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