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영화배우 신성일씨가 돌아 가셨는데, 나는 사람의 임종을 몇번 지켜 본 적이 있다.
그때 마다 저 사람이 얼마나 고통 스러울까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매번 임종을 앞둔 사람들을 보며 느낀것은… 저 사람이 얼마나 두려울 수 있을까… 라는 점이다.
임종을 앞둔 사람들은 우리들의 예상과는 달리,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가쁜 호흡과 그르렁 가래 끓는 소리, 신체의 떨림과 경직, 다리 팔 같은 신체에 나타나는 반점 현상, 얼굴에 나타나는 황달기, 초점없이 천정을 바라보는 눈, 말리기 시작하는 혀 등등.. 임종 직전의 징조들이 우리들의 눈에는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현대의학의 발전과 많은 Pain
Reliever 옵션들 때문에… 걱정할 만큼의 큰 고통은 없다고 한다. 그냥 신체의 기능들이 급작스레 저하되며 All Stop 으로 향하는 현상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날때 Ironical 하게도 우리에게 직접 고통을 주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낳아주시는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그 고통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죽을때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친구들에게 그 고통을 느끼게 하시고, 죽는 우리에겐 역시 마지막 길을 편하게 인도하시는듯 하다.
그런데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을 한번 생각해 보자.
어느날 내가 눈을 떠보니 어두운 밤인데 내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뒤를 바라보니 나의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과 친구들이 함께 모여 즐겁게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아~ 나도 저기에 남고 싶다… 라고 생각하지만 어디론지 가야 한다.
살만치 살은 내가 두려운건… 나에게서 나의 가족.친지들이 누리고 있는 그 즐거움의 박탈이 아닐것이다. 그들이 즐겁게만 지낸다면 나는 만족하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어디로 가는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이 없다면 .. 이것이야말로 극도의 불안과 공포가 될것이다.
사람들은 애써 의도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피한다. 아예 생각 자체도 안 하려고 한다. 그리고는 “죽으면 한줌의 흙으로…” 라는 거짓말로 위안을 한다.
정말 죽으면 완전 끝인가… 그냥 잠자듯 존재가 없어진다는게 맞는 말인가?
그건 거짓말이다.
내가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크리스챤 관점으로 할 얘기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굳이 그런 각도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자연인의 논리로도 충분히 얘기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죽었는데… 정말… 정말… 나의 존재가 끝난것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리고 그 시작은 죽기 전에 내가 택했던 그 선택에 의해 시작된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상황에선 .. 불공평하다.. 억울하다 분하다.. 라는 변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컨드 챈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영원하다.. 라고 한다면… 솔찍히 한번 쯤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주제가 아닐까 말하고 싶다.
믿지 못하겠다와.. 믿고 싶지 않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믿지 “않는것” 은 결국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이다. 믿지 않는것은 증거나 설명의 유무에 관계없이 그것에 동의 하기 싫다는 나의 의지적 선택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했는데… 그 믿지 않겠다는 “오기”는 얼마나 엄청난 “도박”이 될것인가?
절대로 물릴 수 없는… 물릴 방법이 없는 그런 도박이다.
그래도… 아닐거야… 라고 용감하게 말하고 싶다면, 임종을 앞둔 자들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도래할것이고 그 죽음은 새로운 영적 현실의 시작을의미한다는것에 대해 우리는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중요한 현실 앞에서 기독교적 신념을 얘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거짓 기독인들 떄문에, 개독교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이런 말이, 무신론자들에게 죽기 전 인생의 어느 순간에 … 하늘의 별을 바라 보든지… 임종을 앞둔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을 본다든지…. 광활한 바닷가에서 보트를 타고가며 생각을 해 보든지… 사업에실패하여 머리털을 움켜지고 한탄하며 생각을 해 보든지.. 적진에서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생각을 해 보든지… 한번 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불씨가 될 수 있다면… 천금보다 더 귀한 말이 될것이다.
죽음은, 생명으로 우리를 이땅에 탄생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소리이다.
긴 여정을 이땅에서 보냈으니 이제 본향으로 돌아 와서 편히 쉬라는 부름이다.
기원을 따라 올라가고 올라가면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 수 있을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죽는것을 “돌아 가셨다” 라고 한다.
돌아 간다는 말은 그 돌아갈 곳이 분명히 있음을 말한다. 그게 본향이다. 그게 천국이다. 그게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영원히 거할 처소라는 말이다.
때로는”가셨습니다” 혹은 ‘떠나셨습니다” 라고 도 한다. 가셨거나 떠나셨다면 “어디로” 라는 분명한 행선지나 목적지가 있기 마련이다. 만일 길거리를 해매듯 무작정 걷는것이라면 “그는 걸어 가셨습니다” 라고 해야 할것이다. 왜 굳이 행선지 없이 걸어간다면 “떠나셨습니다” 나 “가셨습니다” 나 “돌아 가셨습니다” 라고 하는가?
기원을 따라 올라 가 보면 어느 시점이든, 하나님의 말씀과 사상이 자연스레 전례되어서 내려온 흔적이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가 기원을 따라 올라가 보면 결국 아담과 이브라는 두사람으로 부터 인류가 기원되었음을 알듯이.
또한 숨을 거두었다 라고 한다. 죽는 자가 숨을 더 쉬었으면 쉬었지 왜 거두겠는가. 코를 힘껏 막아 보아라.. 그대로 받아들이고 결국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자살은 거두려해도 거둘 수 없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자살이 가능할 뿐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숨이 막히면 별짓을 다해서라도 숨을 쉬려고 한다. 그게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본능이다.
그러므로 숨을”거두었다” 라는 말은 그 누구가 숨을 중지 시켰다 혹은 그 누구가 숨을 가져겼다.. 라는 말이다. 그 분이 누구신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아예 따져 보지도 깊히 생각해 보지도 않은채… I Don’t Believe~ 라는 무책임한 말 한마디로 결론 지어 버릴 만큼 우리의 인생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될것이다.
만일… 만일… 백에 하나.. 이말이 사실이라면.. 그때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Nothing!
죽은 다음에 내가 할 수 있는것은 미안하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기 전까지가… 나의 마지막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경솔하게 세상 다 아는것 같이 고양이 낮짝 만큼 작은 자기 아집으로 마음을 닫아 버리고, 나중에 정말 나의 생명이 다 한다음, 거대한 진실의 순간 앞에서 … 통곡하지 말고.. 정말 한번 쯤은 진지하게 희죽거리지 말고 거만하게 오만방자하지 말고.. 영겁을 결정지을 그 사실에 관해.. 한번 진지하게 알아 보고.. 연구해 보고.. 따져보고.. 반박해 보고…별짓을 다 해 보아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너무나 너무나 중요하고 엄청나고 거대한 결정사항이기 때문이다.
안다.
영적인 은혜없이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하기는 불가능 하다. 레마와 로고스로 구별되는 이 말씀은 문학적 로고스가 영적인 레마로 변해야만, Said Word 가 saying Word로 변해야만,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된다. 그런데 일반인이 이런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되려면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하다.
어떤 이는 이런 영적인 역사가 두렵다고 한다. 마치 사탄에게 영적으로 올가미를 쏘이게 되는 상황이 두렵듯이… 마치 이단 사이비의 세뇌공작에 말려드는게 두렵듯이, 나쁜최면사에게 자기의 마음을 빼앗기는게 두렵듯이… 맞는 말이다.
신앙은 정말 잘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거다… 열심히 조사해 보고 분석해 보고 반박해 보고 알아 보라는 것이다. 그대신 가만히 앉아서 “아니다” 라고만 하지는 말라는 얘기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Due Diligence를 해 보라는 것이다. 비지니스나 프로젝트를 하기 전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프로젝트의 배경과 사실등에 관해 알아 보고 조사 해 보는 노력을 해 볼것이다.
나의 영원한 진로를 결정하는 이 영적인 미스테리도 철저하게 조사해 보고 알아 보라는 것이다.
세계 기독교 인구가 약 30%가 넘는다. 이 인구가 다들 허구나 엉터리가 아닐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기독교인들이 외치는 예수가 정말 허구로 지어낸 인물이라면 과연 최면술에 빠져, 선동에 빠져, 망상에 빠져, 음모에 빠져… 일부러 자기네들끼리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그 허수아비 때문에 목숨까지 져버리며 순교한 수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럼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이익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는지… 아니면 정신병자들인지… 어니면 진짜 바보들인지 .. 나를 포함한 수 많은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할것이다.
신화로만 생각하는 구약시대의 사건들이 혹시 정말 사실적 역사는 아닌지.. 생각은 (연구나 조사나) 해 보고 엉터리라고 하는것인다? 구약에 나오는 사건들이 이미 고고학등을 통해 증명 되지 않은것들이 있는지… 소돔과고모라성의 존재, 소금기둥, 바벨탑과 느부가넷살 대왕, 여리고 성의 무너짐, 요셉과 7년 풍작과 7년 흉년사건, 출애급 사건, 예수님 돌아가실때의 지진과 천지현상 등등등… 오히려 이제는 고고학이 성경의 기록을 의지하며 위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우리는 역사책을 믿는다. 이순신 장군이나 알렉산더 대왕을 우리가 보았기 때문에 믿는가? 우리는 역사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의심없이 믿는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많은 사본을 가지고 있는 믿어 의심치 않는 역사책 보다, 그 (사건에 가까운) 연대및 사본 숫자에서 수십 수백배 신빙성과 권수를 자랑하는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역사”가 그저 신화와 허위라고 말한다면.. 이건 합리적 논리를 믿는 지성인으로서의 올바른 비평 태도가 아닐것이다.
즉, 이것은 증거가 없어서 못 믿는것이 아니라, 증거에 관계없이 그냥 안 믿겠다… 는 것이다.
그리하여 알렉산더 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의 역사 기록보다, 예수에 대한 기록이 성경을비롯해서 일반 역사서에 더 많이 더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면, 이 또한 Fair 하게 생각해 보야야 할것이 아닌가라는 말이다.
이것도 I Don’t Want To… 로 끝날 문제인가? 참 쉽게도 결론 낸다.
그러면서도 죽은 다음에.. 모든것을 알게 되는 그때에 … it’s
not Fair.. I didn’t have a chance to know… Nobody told me about that… 이라고 변명을 할수 있을것인가?
죽음앞에선 모두가 엄숙해 진다. 모든게 끝난다는 사실 앞에선 거짓말을 할 시간도 여유도 이유도 없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죽은 다음의 사실들에 대해 한번 쯤은 생각해 보아야 할것이다.
마지막으로 톨스토이와 키케로의 명언을 말하고 마친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톨스토이)
“나는 나의 집을 떠나듯이 인생을 하직하는것이 아니라, 여인숙을 떠나듯이 인생을 하직한다” (키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