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다음 두가지 소리는 나를 멈추게 한다.
교회 종소리와 아기 웃음소리다.
교회 종소리는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주고, 아기 웃음소리는 내 마음을 단순하게 하여준다. 나의 마음이 깨끗하고 단순해 지면 행복한거 아닌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종소리와 아기 웃음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교회가 있는데도 가정이 있는데도 종소리와 아기 웃음소리는 듣기가 힘들어 진다.
분명히 무언가 문제가 있다.
종소리가 안 나는것은 종 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고 아이 웃음소리가 안 나는것은 아이를 웃게 만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것이다.
종치는 사람과 아이를 웃게 만드는 사람은 다 우리들이다.
우리들이 문제다.
종과 아이들은 죄가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종을 만져보고 아이를 이상스럽게 쳐다 보고 있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그렇다.
누군가가 새벽에 일어나서 그 종을 쳐야 종이 소리가 난다.
누군가가 아이를 기쁘게 해 줘야 그 아이가 웃는다.
수많은 이론가들이 교회 안팍으로 있다. 그들은 형이상학적 신학교리적 더 나아가서는 정치외교적 이론으로 왜 그 종이 안 울리는가를 깊이 연구하고 있다.
자기가 새벽에 일어나 그 종을 울리면 되는걸 가지고.
수많은 엄마아빠가 있다. 그들은 전문적 능력과 세상적 수완을 가지고 집안에 물질과 편안함을 가지고 오는데도 안 웃는 아이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I’m bringing home the
bacons, so why not smile?)
자기가 아이를 웃게 만들면 되는데.
모두 다 자기는 쏘옥 빠져 있고 결과만 바라본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원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것이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앞에 나타나는 구원자는 은혜다. 그리고 그 구원자가 던져주는 밧줄은 믿음이다. 구원이라는 현실이 눈앞에지금 기다리고 있지만 내가 그 밧줄을 내 손으로 잡지 않으면 그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행복이라는 포텐셜을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보고만 있으면 그것을 가질 수 없다. 내가 나의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겨 내 손으로.. 내가.. 바로 내가 … 그 행복의 끄나풀을 잡아야 한다.
0이란 숫자의 나에게 수천 수만의 가능성을 곱해봐야 그 결과는 항시 0이다.
작으나마 내가 1이란 숫자가 된다면, 수천 수만이 곱해지게 되면 그때의 결과는 엄청나다.
우리는 Talker 가 아닌 Doer 가 되어야 겠다.
우리는 Analyzer 가 아닌 Performer 가 되어야 겠다.
우리는 Designer 가 아닌 Deliverer 가 되어야 겠다.
우리 교회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아닌 남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문제나 잇슈가 일어나면 남을 분석하고 관찰하고 해부한다. 나는 쏘옥 빠져있다.
내가 남에게 읽어보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그렇게 하라고 들이대는 그 성경구절은 사실은
나를 위함이다.
내가 그렇게 해야 되는데 나는 남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에게 큰 질책 받을거라며 훈계하는 그 장면은 대상이 바뀌었다.
모두가 나는 빼고 남만 쳐다 본다. 종치는 사람도 아이 엄마 아빠도.
박집사도 정권사도 이장로도 신목사도… 모두가 남만 바라본다… 나는 쏘옥 빼고.
다시 교회에서 그 종소리와 가정에서 아기들의 웃음소리를 많이 듣게 되는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것들을 듣게 된다면 나는 깨끗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인생을 더 행복하게 살아 나갈 수 있을것 같은 마음이다.
내가 외롭고 지칠때 들리는 교회 종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내가 다시 힘차게 일어날 수 있는 필요충분 조건이 될것이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