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저는 무협소설을 무척 즐겨 읽었습니다.
주인공이 어릴적 부터 어느 무림고수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다가, 어느날
사부께서“이제 너는떠날때가 되었다” 하며 하산을 허락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맞습니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께서도 저에게 그러셨지만, 저도 제 자녀들이 어렸을적에 이것은 되고 저것은 하지말라고
사사건건 (?)간섭하고 따르게 한적이 있습니다. 특히
막내딸에겐 밤 10시 이전에 반드시 집에 들어 오라고 엄하게 한적도 있습니다.
그 밖에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junk food 먹지마라,책상에 똑바로앉아서 공부하라, 예습하라
복습하라, 어른들이 오면 일어나서 인사하라 예배시간 안늦게 미리 떠나라 매일 기도하라 설겆이하라
등등..
그런데 그딸이 이제 대학을 졸업할 나이입니다.
저는 더이상 이런 저런 간섭을 일체 안합니다. (저의 와이프는 계속 하지만..ㅎㅎㅎ)
그러면 제가 예전에 가졌던 그 가치관과 그 기준들이 달라졌기 떄문에 더이상 간섭을 하지 않는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과 동일한 가치관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간섭을 안하니까 제 딸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방종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말 안해도 돌아올 시간이 되면 지가 알아서 집에 들어오고, 자기가 알아서 건강에 좋은 음식을 가려먹고, 어른들이 오면 방에서 나와서 인사하고 자기가 알아서 설겆이 하고.. 예전에 제가 간섭했던
그대로 거의 합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때” 가 차서 이제는 부모의 간섭이 없어도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절제하고
지킬수 있다는 얘기 입니다.
겉으로 보면, 결과적으로 예전과 동일한 것들을 지키고 있지만, 그 내용적으론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전엔 누가 (부모가) 시키고
간섭하기떄문에‘할수없이’ 어떤 룰을 지켜야 했지만, 지금은 누구의 간섭이 없는데도 자기 ‘스스로’ 지킨다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물론 하루정도 반가운 친구만나서 친구와 외박할수도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큰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큰일이 아닙니다. 성년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외박을 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외박하면 혼 나는것도 아닌데 웬지 외박을 하고 싶지
않기 떄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생각하는 ‘율법’과 ‘은혜’의 어느 한 측면에서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오시기전 우리들은 율법이 필요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정의가 필요했고
그 가이드라인이 필요했고 또 그것들을 어길시 적절한 체벌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그 ‘때’가 안되었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야 했고 율법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어린애들이 집안의
룰을 싫어하듯이 우리들도 율법을 지키면서도 싫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드디어
왔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시키시고 그로부터의 속박을 푸셨습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그 하나님의 ‘룰’을 지킬수 있다고 하나님이 판단하셨기 떄문입니다.
마치 사부가 제자에게 하산하라고 하용하신것 처럼, 마치 제가 제 딸아이가
성년이 되어 스스로 할수 있다고 생각한것 처럼, 예수님의 대속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때’가 되었다고 판단 하신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십계명의 내용에 대해서 반박하는 신도들은
없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지켜야 했고 어길시 심판이 있었던 반면, 지금은 우리가 스스로 지키기를 원해서 지켜야 하는게
다른점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감한 십일조 얘기를 하렵니다.
십일조의 사상은 울법제정 이전부터 흐르고 있었고 하나님의
세상 운영의 거대한 원리의 한 부분인만큼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것입니다.잇슈는 그것이 아직도 지켜야 할 율법이냐 아니면 율법을 초월한 성도로서의 자발적인 헌금행위이냐
하는것입니다. 분명한건 우리는 이제 더이상 율법아래에 있지 않다는게 성경의 가르침 입니다. 그러면 율법아래에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십일조를 안해도 되는냐는 다른 잇슈입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 다른 잇슈를 혼합해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시대를 벗어나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엄연한 사실
입니다.
십일조는 예외다 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성경적으로 옳바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한 많은 성도들이 율법에 매이지 않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십일조를 어김없이 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율법의 가르침 때문에 십일조를 강제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이제는 은혜속에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율법이전에
세우신 십일조의 그 원리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고 싶기 떄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일조에 대한 찬반의 의견과 신학적인 근거.반박등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관점은, 더 이상 십일조를 어떤 ‘의무’ 적인
행위로 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꼬박꼬박 하는것이 옳바른 신앙의 선결사항은 아닙니다. 오히려 옳바른
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자연스레 십일조를 하게된다 라는 말이 옳을것입니다. 부흥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가 부흥하듯.. 그리고 선한 행위를 하기 떄문에 구원을 받는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선한 행위를 하는것 처럼, 우리들도 십일조가 지켜야할 울법이기에 행하는것이 아니라,은혜받은 우리들이 기꺼히 기쁨으로 드리고 싶은게 십일조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산속에서 (울법) 수련하다 사부로 부터 하산을 명받고 세상에(은혜) 나와 활약하는 고수가 아직도 예전 사부의 가르침을 가슴깊히 기억하며 살아나가듯이,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것인가 무엇을 절제해야 할것인가를 교육 시켰고, 그 원리를 가슴깊히 새긴 우리들이
비록 산속 (울법) 에 있지는 않지만 세상 (은혜) 에 살면서 그 가름침을 자발적으로 따르는 모습이야 말로,진정으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그런 신앙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사부의 입장에선 하산한 제자가 불평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기르침을 억지로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보다는, 자신의 형편에 맞게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모습이 더 대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울법과 은혜는 웬수 (?) 지간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 관계라고
저는 결론 짓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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