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수 없이 하고 받아 본 질문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냐” 라는 것이다.
일단 개인적인 결론을 내고 설명을 해 보자 한다. 나의 개인적인 결론은 NO 다.
그전에 나의 개인적 경험 세가지를 먼저 얘기할텐데 결코 조금의 거짓이 없는 사실임을 먼저 밝힌다.
첫 경험은, 내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불타는 열정과 굳센 믿음을 추구하던 대학 시절의 사건이다. 1981년 4월이다. 출석하던 교회의 춘계 부훙회 새벽기도때다. 마지막날 설교가 끝나고 이어서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모든 교인들이 다 떠난 후에도 정말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의 어깨위로 담요를 덮어 주며 나를 (느낄 수 있게) 안아 주는 것이 아닌가.
쳐다 보지 않았다. 분명 혼자 기도하고 있는 내가 추울까바 목사님께서 담요를 덮어주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속 기도를 하는데 이런 느낌이 또 한번 더 들었다.
고마움은 표시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순간 뒤를 돌아 보았는데 그 아무도 없었다. 나는 성령의 Touch 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두번째 경험은, 역시 오래전. 깊은 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나의 이름을 또렸하게 불렀다. 두번 불렀다. 설명해보면, 사람이 내 면전에서 ‘XX야~ ‘ 이렇게 audibly부르는것은 아니었다.
부연 설명하자면, 지금 자기 이름을 한번 실지로 소리내어 ‘XX야~’ 하고 불러보기 바란다. 그리고 입을 닫고 마음 속으로 다시 자기 이름을 불러 보기 바란다. 무엇이 다른가? 귀로 들리는소리가 있고 마음으로 들리는 소리가 분명히 있지 않는가? 그렇지만 귀로 들었던 마음으로 들었던 분명히 자기 이름이 불리어 졌다는것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이름을 부른다는 자각은 분명히 있는데 내 마음속의 음성이다.
그런데 혹시나하는 의심을 없애버린 또 하나의 음성은 “Matt.
4:4!” 라는 분명하고도
clear 한 그 다음 음성이다. 그러니까 “XX야… XX야…” 라고 음성이 들려 왔고
내가 깨어남과 동시에 “Matt.
4:4!” 라는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세번째 경험은 조금 too-personal 한 것이지만 share 하기로 한다.
역시 오래전 내가 어려운 인생의 상황에 빠져 있었을 때의 경험이다. 그날은 내가 특별히 기도를 하고 하소연 하고 싶었다. 그때는 거의 항시 그랬듯이 나는 기도할때 성경책을 내 앞에 두고 하는데, 그날은 그 성경책 위에 노란 색의 쇠 십자가를 얹어 놓고 기도를 하였다. 나는 성경책에서 대략 5-6 인치쯤 떨어져 두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계속 기도 하던중, 갑자기 머리가 쭈뼜하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니, 예전에 대전의 집에 살때 화장실이 뒷쪽이라 밤에 거기를 지나면서 나무 그림자에 놀랄 때의 그런 느낌 비슷한것이 갑자기 느껴진것이다. 순간 겁도 나고 당황하여 속으로 “주님~” 외치는 순간, 아마도 다음 상황은 그 누구도 이해나 동의 못할것으로 안다만, 성경책 위에 놓여 있던 그 노란 십자가가 나의 손으로 (빨려서? 굴러서?) 들어 온 것이다. 놀랍게도 그것을 느끼는 순간 그 두려운 느낌과 상황은 종료되었다.
나는 이런 얘기는, 특히 3번째것은, 공공연하게 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을 특별한 (영적) 사건이라고 떠벌릴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리고 그것을 100% 믿어 줄 사람도 100% 없다는걸 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다. 장로가 거짓말을 하겠는가 (아.. 물론 거짓말하는 장로들도 있다만).
지금부터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위에서 예를 들은 사건(?) 들은 다 100% 나 개인적 체험이다. 그런데 진위를 떠나서라도 이런 개인적인 체험을 Generalize 할 수는 없다. 즉, 내가 이런것들을 경험했기 떄문에 이런 것들이 영적인 Norm (보편화) 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시기도 하였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그런데 모두가 선지자/대제사장들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다 성경의 저자 (Author) 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 (구약/신약) 을 썼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음성은 이 성경안에 다 이미 포함되었다는 말이 된다.
물론 나의 경험같이 개인적으로 체험되고 자각되는 ‘음성’은 없다고 말 할 수 없을런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은 어느때 어느 시기라도 ‘적용’ 될 수 있는 오묘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3,500여년 전에 모세에게 주셨던 그 똑같은 음성이 이 시대에도 성경을 통해 이 시대의 나의 상황에 맞는 ‘음성’으로 들릴 수 있는 오묘한 Power 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첫째 성경을 통해 내가 들을 수 있다면, 두번째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burn-In 된 ‘양심’을 통해 들을 수 도 있다. 내가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할때 내가 원하는 방향이 있지만 자꾸만 나를 붙잡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그 ‘무엇’ 말고 내가 원하는, 내가 바라는, 그것을 내가 (사욕으로) 원하기 떄문에 혹시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였으면 하고 기도하는것은 아닌가?
예를 들면, 내가 실직당하고 파산이 날 situation 에서 잠시 벗어나려, 혼자 산속을 hiking 하다가 가방을 주었는데 그속에는 10만불 cash 가 있었다 하자. 그것을 가지고 마음에 시험(?) 이 와서 기도를 시작한다.
주님.. 이것이 혹시 경제적 난관에 빠져있는 저에게 주님께서 특별히 주시는 응답이 아니온지요? 응답을 주세요.. 음성듣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는 가운데도 마음 한 구석에는 아까부터 그리고 처음부터 “아니다 이건 가까운 Police 에 신고를 해야 한다” 라는 음성이분명히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양심’ 이다. 우리 모두 다 에게 기본적으로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음성’ 이다. 그런데도 이 음성을 알면서도 그것 이외의 하나님의 음성을 추구한다. 즉, 자기가 바라는 그 무엇에 맞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는것이다.
이 상황에선 조금이라도 자기 의도에 맞는 느낌이나 분위기가 생기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자가최면을 걸며 자신을 다독거린다. 그래 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 감사합니다 하나님! 잘 쓰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구하고 바라는 올바른 성도의 태도는 전혀 아니다.
세번째 하나님 음성을 듣는 방법은 자연/역사의 흐름이나 신실한 하나님의 조언을 통해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한다면 이것 부터 잘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솔로몬이 죽고 난 다음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분명 솔로몬을 통한 하나님의 명령 (‘음성’) 이 있었음에도 그는 자기 생각과 비슷한 자기 친구들과 관료들의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밀어 부쳤다. 그 결과는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할땐, 정말 신실한 친구나 조언자를 찾아가야 한다. 머리 좋고 능력있고 카리스마있고 언변 좋은 사람들을 찾아가선 안된다. 물론 그들의 말은 Sweet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의도에 만족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 이라고 생각하는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아마도 네번째 빠질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방법은 ‘기도’ 일 것이다.
그런데 기도할때 나의 기대와 바람을 pre-requisite
(선제 조건) 으로 가지고 들어 가면 안된다. 내가 기대하는 방법으로 방향으로 음성듣기를 원하면 안된다. 어떤 방법으로 하실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우리 인간은 영약하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경이나 상황을 잘 ‘요리’하여 steer 할 수 있다. 마치 논문의 결론을 내어 놓고 각종 자료와 사례를 그 목적에 맞추어 짜집기 하는 것과도 동일하다.
우리는 기도할때 마음을 100% 비우고 나의 바램 나의 의도를 철저히 배제한채 기도를 통해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면 양심과 말씀과 주위 선배들의 조언과 상황의 진행상황을 통해 충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말씀, 양심, 멘토, 기도등의 ‘음성’ 듣는 방법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음을 자각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십분 활용해야 할것이다.
마지막으로, 너무 개인적 체험을 등안시 (?) 하는것 같아, 하나님 음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믿음’ 에 대한 조크 한마디 하면서 맺는다.
어느 마을의 다운타운에 구둣방이 하나 있었다. 그 다운타운에는 버스 노선이 있었는데 당연히 버스가 서는 Bus Stop 위치가 따로 정해져 있다.
구둣방 할아버지가 어느날 가만히 보니까, 왠 꼬마 하나가 버스를 기다리는데 정류소에서 안기다리고 딴데서 기다리고 있는것이다.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놈아~ 거긴 버스가 안서… 조금 더 가서 버스 정류소에서 기다려!”
그렇지만 꼬마는 웃으며 손을 흔들뿐 그곳에 계속 서 있는것이다.
(여기서 잠깐,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음도 법칙이 있다. 내가 무엇을 굳게 믿는다고 그게 다 보편화 되는것은 아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보편적 믿음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자,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잠시후, 가운데서 기다리던 꼬마 앞에 뻐스가 끼이익 하고 서는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할아버지가 일어나서 쳐다보는데, 그 꼬마가 버스에 올라 타며 한마디 한다.
“이 버스 운전사는 우리 아빠예요~”
그러니까 보편적 믿음이 prevail 하지만 떄로는 아주 떄로는 exception 도 있을 수 있다는 말도된다. 하나님꼐서 특별히 개인에게 개인적으로 허락하시는 그런 exception 말이다. 이건 비성경적이지 않다. 충분히 가능하다.
보편적인 적용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긴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예외적 경험을 허락하시기도 한다. 이것을 ‘기적’ 이라고도 한다. 믿음에도 예외가 있고 하나님 음성 듣는데도 예외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예외는 예외일 뿐이다.
그리고 자랑 할것도 못 된다.
성경과 양심과 조언과 기도를 통해 역사하는 기적을 맛보는자들이 사실은 더 축복 받은 자들이다.
예외적으로 맛보는 자들은 오히려 그렇게 해야만 ‘믿음’을 지속할 수 있는 약한 성도 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