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중에 제일 쓰고도 단 약이 구약과 신약이다. ㅎㅎㅎ
그 신약 중에,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서 (Synoptic Gospels) 라고 한다.
그리스어의 Syn (함께) 과 Opsis (봄) 가 합쳐진 말
“Synopsis” 를 한자어로 직역한 말인데 쉽게 말해 … 같은 관점 (perspective) 에서 기록된 복음서 라는 뜻이다.
여기에 비해 조금 다른 관점에서 쓰여진 복음서인 요한복음도 있는데, 이 4복음이 공통적으로 기록한 사건중에 하나가 베드로의 배신 (?) 에 관한 기록이다.
베드로의 배신… 그것도 예수님이 12 제자 중 제일 먼저 Recruit 하시고 ‘수제자’ 로 삼은 베드로의 배신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모함과 흉계로 체포 당하기 바로 직전,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할 것이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했다.
그러자 요한 못지않게 승질이 급한 베드로가 발끈하며 “나가 시방 대글박에 돌을 맞고 주님과 함께 허벌라게 죽을지언정 나가 결코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을것이지라~” 하며 콧 바람을 날리며 흥분해서 말했다.
은은한 그리고 측은한 표정으로 (내가 보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또 말씀하셨다.
“어허~ 야야~ 흥분하지마아~ 그리고 잘 들어~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말여…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것이여~”
예수님 말대로 베드로는 그날 밤에 3번 주님을 부인했다.
그리고 닭이 꼬끼오~ 하며 울었다.
여기에서 우리의 의문이 시작된다.
예를 들어, 내가 내 아들에게
“너는 오늘 네 친구집에 가기 전까지 니 방 청소 다 해 놓을 거야!” 라고 말을 했다고 하자.
이것은 ‘예언’ 인가 ‘명령’ 인가 ‘유도’ 인가??
자 어쨋든 내 아들이 결국 … 방 청소를 했다고 치자.
그러면 .. 청소를 한 것에 대한 설명은 오직 다음의 3가지 가능성 밖에 없다.
첫째는, 내가 암암리에 내 아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아들이 두려워서 (?) 나가기 전까지 방 청소를 했을 수도 있다.
둘째는, 내 아들이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도록 간접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유도>를 했을 수도 있다.
세째는, 내가 진짜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어서 아들녀석이 결국 청소를 하는 것을 미리 보고 <예언> 한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베드로의 경우로 돌아가 본다.
주님이 <명령>을 한 것인가?
닭이 울기 전에 너 나를 3번 부인해!!! 라고?
Non-sense 인것을 우리는 안다.
주님이 <유도> 를 한 것인가?
No!
비겁하게 (?) 기교는 쓰지 않으신다.
그러면 남은 한가지 옵션은.. 바로 말 그대로 <예언> 이다.
이것에 일단 Agree 해야 다음으로 넘어 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가 3번 부인할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아시고” 예언 했다는데 동의 하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Perspective 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Calvin 의 예정론 (Predestination) 을 보면..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이미 예정 (Predestined) 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성경 말씀이며 특히 장로교회의 중요 교리중 하나가 된다.
그런데 칼빈은 그 구원받을 자가 어떻게 선택되어지느냐는 순전히 하나님 “맘대로” 라고한다.
Sovereignty 라고 얘기한다.
그건 하나님의 ‘주권’ 이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에 의해 너와 내가 구원받게 선택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아무도 이것에 대해 왈가왈부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 즉, 선택 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자는… 그냥 그것에 대해 감사하고…. 구원에서 탈락한 자는 별 도리가 없다는것이다…. 그저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같은 Christianity 써클안에 알미니안 파가 있다.
칼빈보다 5-60년 후에 태어난 알미니우스는 신학교 교수였는데, 그의 교리는 칼빈의 소위 말하는 T.U.L.I.P. (5대 강령) 에 head-to-head 로 반박을 한다.
그 내용에 깊게 들어가 보자는 건 아니고 그중에서도 가장 부딪치는 것이 바로 이 예정론과 자유선택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에 이르는 데에는 (인간들의) 자유선택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한단계 더 나아가 보면, 구원 받을 자가… 오직 하나님 주권대로 무조건 선택되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예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이유 때문에 “예정”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지배하시는 분이신고로… 이갑식장로의 미래에 대해일거수 일투족 다 알고계신다.
그래서 가만히 이장로의 미래를 보니까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온 그 이듬 해에 예수를 영접하는게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장로를 구원받을 자라고 <예정> 했다는 것이다.
내가 영화를 미리 보고… 끝 부분에 주인공이 다시 살아 난다는 걸
안 다음, 영화 처음 보는 친구에게.. 저 주인공
결국 살아 날거야~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이 말도 일리가 전혀 없는것이 아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자기의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내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기 떄문에, 그 사실 (결국 미래에 구원을 accept 할 것인가 reject 할 것인가) 을 기반으로 하여 “예정” 하셨다는 말이다.
복잡한 교리는 여기서 그친다.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하고 싶다.
처음에 내가 내 아들이 방 청소를 결국 하는것을 예로들면서, 이것이 ‘예언’ 인가 ‘명령’ 인가 ‘유도’인가 라고 질문했다.
나는 셋 다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들이 방 청소를 하는 것은, 나의 명령이기도 하고, 나의 유도이기도 하고, 결국 그럴것이라는 것을 아는 나의 예지이기도 하다.
아빠가 이런 말 (방 청소해라) 을 꺼냈다는 것은 결국 방 청소에 대한 명령이 맞다.
아빠가 설령 명령이 아니더라도 그 말을 꺼냈다는 것은 결국 그렇게 (방 청소) 하라는 유도이기도 하다는것을 바보가 아닌 내 아들은 알고 있다.
내 아들이 방 청소를 결국 할 것이라는 것은 그를 낳고 키우고 십수년간 그와 함께 생활 해 온 아빠가 너무나 아들의 성정에 대해 빤히 잘 알고 있기에… 그가 방 청소를 결국 할것이라는 예언이 되는 셈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것이 명령이나 유도란 말인가?
Non sense 라고 처음에 말했지만
그것은 단지 인간의 Perspective 에서 이해가 되도록 얘기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말씀 (예언) 을 지키려고 일부러 애써서 따르는 모습을 많이 본다.
간단한 예로는 나귀를 타고 입성 하시는 모습 …
그리고는 십자가상에서의 죽음등이 있다.
그냥 물 흐르듯 흘러가다 에언대로 되어야 그게 예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인간적 Perspective 에서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 자신이 노력하여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도 엄연한 예언의 성취가 된다. 그런 예언 성취가 성경에는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은 상상초월의 간격이 있다.
개미떼가 줄지어 길을 가다가 앞에 있는 물 때문에 꼼짝 못한다.
이떄 인간이 나무가지를 꺽어 물 위에 놓아주면 그게 다리가 되어 개미떼가 지나 간다.
개미떼들에겐 그게 ‘기적’이다.
인간이 나무다리를 만들어 준것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개미의 지능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골몰히 생각하면 그게 개미로선 상상과 망상과 공상이 된다.
같은 피조물인 인간과 개미 조차도 이런 극도의 격차를 보이는데, 피조물과 창조자의 간격은 그 보다 무한대의 차이가 있을 거라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의 <자유의지> 는 하나님의 관점에선 <예정> 이 충분히 될 수 있다.
오래 전에 어느 여자가 마약.술.도박등에 인생을 탕진하고 어느날 자살을 결심하고 차를 몰고 캔사스 주 I-70 서쪽으로 달려 가다가 길이 어두워 지자, 어느 모텔에 들어 갔다.
방에 들어 가 보니 왠일인지 라디오가 켜져 있었다.
그 방송은 (나중에 안거지만) 척.스윈돌목사가 설교하는 Insight for Living 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소파에 앉아 피스톨을 입에 집어 넣고 마악 방아쇠를 답아 당기려 하는데… “… 인생에 지친 자가 있으면 다음 번호로 전화를 주세요…” 라는 안내 메시지가 들려 왔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여자가 감동을 받았는지.. 그 번호로 다이얼을 돌렸다.
결과적으로 그 여자는 훗날 목사가 되었다는 실화이다.
질문을 해 본다.
다이얼을 돌린 사람은 누구인가?
맞다!
당연히 그 여자이다.
그런데 그 여자가 다이얼을 돌리는 그 장면에서 빠르게 Zoom Out 하여 캔사스를 벗어나, 미국을 벗어나,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벗어나고보니.. 하나님이 보인다.
하나님이 그녀로 하여금 그 다이얼을 돌리게 했다고 하면… 과언일까?
아니다.. 그게 사실이다.
그러면 다이얼을 돌린 그 여자의 <자유의지> 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 이라고 해도 틀린말은 아닌 것이 된다.
우리 인간의 관점에선 자유의지 어쩌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미리 알아서 예정을 했건 전지전능으로 예정을 했건… 이 모든 것은 다 그의 섭리속에 있는 인생사가 된다.
내가 우연히 금덩어리를 발견했던, 수년간 여기 저기 노력하여 찾아냈던… 금덩어리 발견은 같은 결과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하나님이 인생사에 심어 놓으신 섭리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내가 아무 노력을 안 해도 얻어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이지만, 내가 절대자를 찾기 위해 말씀속에서 노력하여 도달하기도 하는… 같은 섭리라고 해도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은 구원이 내 노력으로 얻어진다라고 하는 비성경적인 말을 옹호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 예수님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그 예언 성취를 위해 노력하였듯이, 우리 믿음의 식구들도 공짜로 다 얻었다고 팔장만 끼고 있지말고, 부단한 Living Faith 를 행사하여야 겠다는 말이다.
Faith 에는 Saving Faith 와 Living Faith 가 있다.
한번 에 끝나는 Saving Faith 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내가 주님을 영접할 때 성취된다.
그러나 living Faith 는 내가 천국가는 그날 까지 내가 얻은 그 구원에 감사하며 보답하는의미에서 행해져야 할 크리스천의 진정한 의무이자 생활이 되어야 한다.
미안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크리스찬이 되기 까지는) 우리들의 Saving Faith 가 아닌 living Faith 를 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Saving Faith 는 절대 겉만 보고 판단 할 수 없다.
그러나 Living Faith 는 단박에 Non-Christian 들도 알아 차린다.
그리고 그들을 교회로 이끌 수 있는것은 Saving Faith 가 아닌 Living Faith 이다.
나 부터도 이 Living Faith 로 세상의 빛이 되는 성도가 되기를 노력하고 싶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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