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예배는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라면, 더 나아가서 교회예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질문해 보는 제목일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제목하나로 논문까지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신학적인이며 교리적이며 이론적인 접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심플하게 정의를 먼저 내릴까 합니다.
현대예배는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이다" 라고.
지금부터 설명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옷"
을 생각하면 우선 그 외면적인 것을 떠오를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다음 조금더 깊히 생각하면 그 "목적"
혹은 "용도" 를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옷은 나의 만족을 위한 목적도 있지만
상대방과의 교제나 예의를 염두에 둔 목적도 있겠습니다.
또 나만의 스타일로 입을수도 있지만 공석에서 요구되는
옷도 있을것입니다.
우리는 이모저모의 예배형태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 옷은 오랫동안 입고온 아주 편한 옷입니다. 그리고 나의 주위에서
거의 매일 자연스레 보게되는 옷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날 제가 이상한 옷을 입게되면 주위의
이상한 시선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옷 자체가 이상해서 그런 것보다는 지금까지
내가 입어왔던 그 옷이 아니기에
그런 시선을 모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옷을 입든지 그 옷이 감싸고 있는 나의
신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에게서 옷이 변하는 것이죠.
이쯤에서 머리가 좋으신 여러분들은 제가 무슨 의도로
옷과 현대예배를 비교하는가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 형태가 변하는 것이지
예배자체가 그리고 예배의 대상이 그리고 예배의 목적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간단한 변화인데 왜 많은 반대와 많은
걱정과 많은 우려와 많은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첫째 변화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반응이 있습니다.
둘째 변화가 우리를 변질시킬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셋째 이런 변화를 자신이 실지로 경험 해 보지 않은
관계로 불확실성에 대한 의심이 생기게 되는것 입니다.
자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여 보십시오. 위에서 말한 세가지 포인트는
전부다 <자신> 의 관점에서 생기게 되는 부정적인 편견임을
알게 됩니다.
첫째, 변화에 대한 거부반응은,
다시말해서 나에게 생기는 어떤 변화에 대한 반응입니다.
내가 싫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남에대한 시각은
아직 없습니다.
둘째, 변화가 우리를 변질 시킬것이라고
걱정 하는 것도, 나에 대한 걱정입니다.
여기 또한 남에 대한 시각은 없습니다.
셋째, 불확실성에 대한 의심
역시, 자신이 경험 안해 보았으니 의심을 하게 되는 지극히 자신만의 시각입니다. 여기에도 남을 위한 시각은 없습니다.
정리해 보면, 변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자신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포함한 대상물에 대한 배려가 결여되어 있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이기적인
시각이라는 점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봅니다.
일반적으로 옷을 바꿀때 자신의 만족만을 생각하고 바꾸는, 다시말해 자기가 좋으면
바꾸고 자기가 싫으면 안바꾸는 그런 시각은,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목적, 예를
들면 수영장에 간다든지 운동하러 간다든지 혹은 파티에 간다든지 면접을 보러 간다든지 하는 목적과 의도에 따라 옷을 바꿔 입을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런 경우에도 나의 선호도 만을 고집한채 면접보러
가는데 반바지를 입고 간다든지, 파티에 가는데 운동복을 입고 간다든지, 수영장가는데 정장을
하고 간다든지
한다면, 무언가 자신의 관점에
의문을 품어야 할것입니다.
현대예배를 시도하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하고
우리는 그 목적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 목적과 의도를 모른채 다른 교회에서 현대예배를
하니까 우리도 한다는 발상은 무척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현대에 사니까 현대예배를 드려야 되는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정확한 대답은
아닙니다.
현대교회 내에서 중세때 처럼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 예배를 안 받아 주실리도 없습니다. 이 역시 현대예배를 드리는
그 목적을 혼동하고있기 떄문입니다.
이제 결론쪽으로 가야겠습니다.
옷으로 시작했으니 옷으로 결론을 내어야 겠습니다.
저는 집에서, 반바지를 입든 정장을
입든 아니면 아예 벗고 있든, 나의 와이프와 예전과 똑같이 대화를 하고 교제를 나눌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일 가난한 이웃을 집으로 초대하려 한다면
의도적으로 수수한 느낌이 드는 옷을 입을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도가 <나의 만족>
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 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의가난한 이웃들도 내가 고급 브랜드 옷을
입고 맞이할때 보다는, 자기들과 비슷한 수수한 옷을 입고 맞이 하는것이 훨씬 대화나 교제하기에 편할것 임은 자명한
일입니다. 우리가 만일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현대예배가 반드시 필요한것은 아닙니다.
중세기때 드리던 그런 형태의 예배도, 만일 우리가 싫증만 안낸다면, 문제될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믿지 않는 주위 사람들의 초청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교회의 예배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해야
된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빌면서 교회 들어오려고 기를
쓰는것이 아닌 이상, 우리가 가진 예배형태를 그들에게 강요하여 먹혀들어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옷을 좀 갈아 입자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느끼기에도 어색하지 않고 편안하게
잘 어울릴수 있는 그런 옷을 입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정장을 하고 넥타이를 매고 있으면서 미소만 짓는다고 반바지에
힙합셔쓰 입은 청년들이 편안하게 우리에게 다가 온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전혀 그들의 세대적 멘탈리티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인터넷에 수많은 동호회 그리고 커뮤니티 들이 생기는지
아시는지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과 <통할>
듯한 사람들만을 모으고 싶다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스타일이 틀리는듯 한 사람과는
아예 처음부터 대화를 안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세대들을 우리가 백년넘게 이어온 전통적 예배
형태로 초청을 할수 있다고 아직도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모든게
가능하다고. 그렇게 성령님이 우리의 노력없이도 모든걸 다 역사 하시는 거라면 왜 우리는 애써 전도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이가 아플때 정작 의사에게는 안가고 기도로 믿습니다만
반복하는 그 믿음만이
진정한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의사의 손길을
통해 역사하심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의 액션을 기다리시는데 죽기까지 믿습니다만 외치고 있을것 입니까. 제 생각엔 우리의 값진 노력을 통해 최선을 보일때 성령님은 더욱 크신 역사를 하실것으로 믿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상 하게도,우리가 옷을 바꿔 입으면
상대방도 좋아하지만, 어쩐지 우리도 그냥 기분이 좋아 진다는 것입니다.
옷이날개라고 했나요.
우리가 예배형태를 현대예배 스타일로 바꾸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우리에게 임재하는 신선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향한 턱을 낮추어
그들을 모으자는 의도로 시도한 현대예배가 <부가적> 인 베니핏을
우리들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모저모로 현대를 살면서 가슴속에다가만 넣어두었던
불만, 즉 지루한 예배 형태, 따분한 진행, 진부한 형식, 이런것들이 새롭게 시도되는 현대에배 형태를 통해 때로는 흥미를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참여의식을 때로는 소명을 때로는 새로운 은혜를
발견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2의 목적이지만 이 정도의
성취도 라면 어디 한번 현대예배를 기획 해 볼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옷을 바꾸어 보실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