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잘 아는 나이가 지긋하신 정집사님이 어느날 저를 다짜고짜 붙잡고 근처 유아실로 데리고 가더니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교회내에서 유스 아이들이 부르는 거덜거덜 거리는 힙합풍의 비트나,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노골적으로 개걸개걸 대는 랩같은 옹알이 짓(?) 이나, 불손하고 불경하고 촌스럽게 들리는 뽕짝풍의 멜로디나, 느그적 느그적 거리는 재즈풍의 선율이나, 고래고래 찢어지게 부르는 헤비메탈 혹은 록 풍의 리듬이나, 하다 못해 감성적인 폼에 빠지는 팝 송들... 이런 것들이 어디 경건한 교회내에서 부를 찬양들이냐… 라고 저에게 … 항의 하듯 일갈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크리스챤 선율로 만들어진 찬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크리스챤 선율이 어떤거냐고 물었더니 잠시 머뭇 거리시다가, 뭐 예를 들면 찬송가 같은 경건하고 차분한 노래 있잖아요~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기를, 그러면 정집사님 말씀은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은 시대가 변하고 어쩌고 해도 그것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그리고 전통적인 “크리스챤” 선율로 된 경건한 풍의 찬양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라고 물었더니… 그렇죠!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묻기를, 그러면 예를 들어, 세상 노래의 선율이나 다른 나라의 민요나 국가나 팝송등도 안되겠네요 했더니, 당연하죠 어떻게 하나님 찬양을 하는데 팝송 선율이나민요같은 세상적인 것들을 씁니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 다시 묻기를,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은 크리스챤 선율이라고 보시는 가요 했더니.. 당근이죠 완전 정통이죠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에 대해서도OK라고 하셨고, <피난처 있으니> 도OK, <시온성과 같은교회> 도 <예수님은 누구신가> 도 OK, <내 주여 뜻대로> 로OK, <내 선한 목자> 도OK 라고 하셨고,
<마귀들과 싸울지라> 도 OK 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 말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는 루터 시대의 유행가였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도 유행가에서,
<피난처 있으니> 는 영국국가,
<시온성과 같은 교회> 는 독일 국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는 무신론자 루쏘가 작곡한곡,
<내 주여 뜻대로> 는 독일 오페라 작곡가 베버의 마탄의 사수 서곡이고, <내 선한 목자> 는 벨기에 세속민요였고,
<마귀들과 싸울지라> 는 미국 소방대원 행진곡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정집사님은 설마~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 확인사살겸 말하기를, 미국 장로교단 찬송가 346장에 그리고 연합장로교 찬송가 229장에 수록되어 미국 교인들이 부르는 선율은 어디서 왔는지 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른다고 하시길래, 미국 찬송가에 수록된 그곡은 영어로 Christ, you are the
fullness 라고 하는데 그 멜로디는 다름아닌 우리나라의 <아리랑> 이라고 했더니, 화를 벌컥 내시면서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중에 집에 가서 그분의 카톡으로 미국 장로교 찬송가 346장을 캡쳐해서 보내 드렸습니다.
여러분.. 선율에는 선과 악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사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챤 찬송은 크리스찬의 사상을 담은 가사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선율이 경건하고 아름다워도 그 가사가 세상적이면 그건 크리스챤 찬양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크리스찬 가사는 어느 장르이건 어느 리듬이건 일단 담기게 되면 그건 크리스찬 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선율> 이 아닌 <가사> 가 크리스챤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오직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말은, 전달해야 할 가사 즉 말씀은 절대적으로 불변해야 하지만, 시대와 환경에 따라 그것 (가사/말씀)을 전달하는 수단 (음악장르/리듬/선율) 은 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80이 넘으신 노인들에게 힙합이나 록을 들려 드려봤자 그저 시끄럽기만 하지만, 트로트 뽕짝 옛노래 선율을 들려 드리면 금방 관심을 끌게 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10대 학생들에게 뽕짝 선율로 공감을 유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에는 선율에 관한 한은, 다양하게 폭넓게 장르를 초월한 찬양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챤 운동가는 운동으로 기독교를 알릴 수 있습니다. 크리스찬 음악가는 음악으로, 크리스찬 소설가는 소설로. 크리스찬 미술가는 미술로. 크리스찬이라는 변치 않는 공통분모는 있지만 그 분야는 다양하고 다릅니다.
이제 결론을 내어 봅니다.
구자억목사가 뽕짝으로 찬양하는것을 아주 못 마땅하게 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선율은 세상의 선율이라고 교육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교회안에서 기타치고 드럼치는것을 터부시 한 때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기타와 드럼은 세상의 악기로 인식되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인식을 바꿀때가 왔습니다. 아니 이미 지나 갔습니다.
전통적인 선율이라고 여겼던 정통 찬송가들도 그당시엔 유행가나 민요나 행진곡이었지만변하는 세월속을 거치는 동안 어느듯 진짜 정통 선율같이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변하는 시대를 외면할 순 없습니다.
오히려 포용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음악의 본질 중 하나는 variety 입니다.
이걸 가두어 놓으면 창작성/창의성이 없어집니다.
이것 없이 어떻게 변하는 세대에 전도를 포함한 여러면으로 대처할 수 있겟습니까.
크리스찬 가사에 focus 하고 선율과 나머지는 다양하게 포용합시다.
그래야 급변하는 세상은 물론 교회내에서의 여러 세대를 다 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 보자면, 크리스찬 선율은 없습니다. 오직 크리스찬 가사만이 존재 할 뿐입니다.
아.. 위에 말한 그 정집사님.. 요즘은 신세대 찬양과 워쉽에 아주 심취해 계신 모양입니다.
크리스찬 랩도 그런대로 괜찮아 보인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