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 바사: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한 아이
잠시 후 그들이 눈을 뜬 곳은 웅장한 메데 왕궁의 황금빛 회랑이었다. 구리 촛대가 타오르고, 병사들이 창을 든 채 양쪽에 줄지어 서 있었다.
철수와 동일은 어느새 궁정 하인 복장을 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또… 사건 속으로 들어왔네.”
철수가 낮게 중얼거렸다.
정동일은 긴장하며 말했다.
“아스티아게스… 메데의 왕.
그리고 그의 딸, 만다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할 뻔한 아기.”
그들의 대화는 곧 들려온 한 비명 같은 절규에 묻혔다.
“왕이시여! 무슨 꿈이었습니까!”
좌우로 밀려나는 장군들 사이로 아스티아게스 왕이 등장했다. 그의 얼굴은 잿빛이었고, 눈에는 잠을 잃은 공포가 박혀 있었다.
“내 딸 만다네가 낳을 아이가… 나의 왕위를 뺏을 것이다! 그 꿈은 너무나 또렷했어… 큰 나무가 그 애 몸에서 솟아 메데 전체를 뒤덮고 더 멀리 페르시아까지! 그 아이는 절대 태어나선 안 된다!”
왕의 음성은 벽을 흔들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철수는 회랑의 기둥 그림자 속에서 어두운 움직임을 보았다.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의 형태를 흉내 내는 것처럼 검은 형상이 잠깐… 왕의 뒤편에 붙었다가 사라졌다.
동일이 숨을 삼켰다.
“왔어….”
철수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왕의 꿈을 무기로 쓰네.”
검은 추적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왕의 공포가 과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꿈은 원래 경고일 수도, 시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왕은 “해석”이 아니라 “공포”에 잡혀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장군, 하르파고스가 얼음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 하명 하십시오.”
아스티아게스는 눈을 뒤집으며 외쳤다. “그 아이를 죽여라! 내 손녀라도 소용없다!”
그 말이 떨어지는 찰나, 하르파고스의 어깨 뒤로 검은 기운이 실처럼 감겼다가 단숨에 사라졌다.
동일이 속삭였다.
“하르파고스를… 휘감았다.”
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을 정당화시키려는 거야. 사람이 제일 약한 구멍이지. 명분.”
철수와 동일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동일이 낮게 말했다.
“이 아이가… 고레스야. 이 아이가 살면 바빌론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해방돼.”
철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야 하는 건 단순한 역사 한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전체가 되는군.”
며칠 후, 철수와 동일은 하르파고스가 고용한 산실의 하인으로 배치되었다. 만다네 공주는 산고로 고통을 겪고 있었고 주변에는 모두 불안한 눈빛뿐이었다.
“저 아이는 태어나면 안 된다.”
누군가 속삭였다.
“왕의 명령이 있다던데…”
철수는 그 음성을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동일은 눈을 감고 기도했다.
“주님… 우리가 이 아이의 생명을 지켜야만 미래가 이어집니다.”
그 순간, 철수는 산실 바깥 복도에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한 하인이 다른 하인에게 쌀쌀맞게 속삭였다.
“산모가 살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명령’이다.”
그 말은 너무 냉정해서, 오히려 누군가의 입김이 느껴졌다. 철수가 SIMON을 아주 짧게 켜서 주변을 훑었다. 화면 가장자리에서 찌그러진 신호가 한 번 ‘툭’ 치고 지나갔다.
검은 추적자의 개입은 언제나 이렇게 티가 났다. 현장을 뒤집는 힘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딱’ 한 번 꺾어놓는 식.
동일이 낮게 말했다.
“그가 원한 건 살인이 아니라… 살인을 쉬운 일로 만드는 분위기야.”
순간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붉고 작고,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는 아이. 바로 그 순간. 하르파고스의 사자가 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기를 내놓아라. 명령은 이미 내려졌다.”
만다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 내 아기를…?”
사자는 찬 눈빛으로 말했다.
“왕의 명령이요. 누구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 사자의 눈빛. 철수는 그 안에서 사람보다 더 검은 것을 느꼈다. 충성심이 아니라, 잔혹함에 취한 확신 같은 것. 검은 추적자는 바로 이런 순간에 사람을 이용한다. 명령을 정의로 착각하게 만든다.
철수는 본능적으로 옆문을 향하며 SIMON를 켰다. 가시 같은 신호들이 산실 근처의 여러 동선을 표시했고 그중 한 지점에서 약한 점멸이 보였다.
동일이 속삭였다.
“저기가… 이미 죽은 아기 시신이 있는 곳?”
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 전, 하르파고스의 하인의 아내가 사산한 아이. 그 비극을, 철수는 계획에 끼워 넣어야 했다. 생각만 해도 목이 메었다.
“바꿔치기 해야 해. 지금.”
철수가 낮게 말했다.
“안 그러면 이 아이는 죽어. 그리고 이 아이는 하인의 아들로 자라나야 돼.”
동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님… 이게 우리가 할 일입니까…”
철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결과를 바꾸는 게 아니라, 결과가 ‘성경대로’ 오게 만드는 길을 지키는 거야.”
사자의 눈은 매서웠고, 하르파고스는 곧 직접 들이닥칠 상황이었다. 철수의 심장에 피가 솟구쳤다.
“동일. 바로 지금이야.”
두 사람은 산실의 혼란 속으로 몸을 던졌다.
산실 뒤편. 천 조각들이 널린 공간. 그곳에서 동일은 숨겨놓은 아기 시신을 확인했다. 작고 차가운 생명. 누군가의 비극. 동일은 주저앉아 두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나님… 너무 잔인한 선택이지만… 이 한 생명 때문에 수많은 백성이 심판에서 벗어나게 될 겁니다. 죄를 묻지 마소서…”
철수는 떨리는 손으로 만다네가 낳은 아이를 감싸 안았다. 그 아이는 작게 끄억거리며 숨을 붙이고 있었다. 그때, 복도 쪽에서, 사자의 발걸음이 ‘정상 속도’가 아니었다. 너무 빨랐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는 것처럼.
동일이 속삭였다.
“철수야… 저거… 빨라.”
철수가 이를 악물었다.
“검은 놈이 사자를 재촉하고 있어. 들켜서 망하게 하려는 거지.”
철수는 SIMON을 순간적으로 조작했다. 원래는 위성/지형 분석용이지만, 기기 자체가 내는 미세한 고주파가 있었다. 철수는 그걸 복도 반사음으로 흩트렸다.
삐— 아주 짧은, 인간이 정확히 인지하기 힘든 소리. 사자는 잠깐 멈칫했다. 마치 자기 귀가 찢긴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바로 그 0.5초가, 생명을 갈랐다. 두 사람은 산실의 혼란을 이용해 두 아기를 재빨리 교체했다. 만다네가 품은 아기는 이미 차가운 시신의 사내 아기였다. 그녀는 오열하며 말했다.
“왜… 왜 울지 않죠…? 제… 제 아기…”
동일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거의 울먹이며, 그러나 확신 있게 말했다.
“공주님… 살아 있습니다. 믿으십시오. 아기는… 살 것입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 아기가 어느 품에 있는지만 달랐을 뿐이다. 하르파고스의 사신이 바꿔치기 된 시신을 거두었다.
“명령은 완수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검은 추적자는 마지막 칼을 꺼내 들었다. ‘완수되었다’는 말을 들은 순간, 복도 끝에서 한 하인이 비명을 질렀다.
“산실에서… 뭔가 이상합니다! 방금… 누가 뛰어갔습니다!”
철수는 눈을 크게 떴다.
“저건… 일부러 터뜨린 소문이야.”
동일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 추적자가 늘 쓰는 방식… 사람 입을 이용해 불을 붙인다.”
그 순간 철수와 동일은 숨을 삼키며 아이를 품고 뒤편의 통로로 뛰었다. SIMON는 미세하게 떨리며 ‘안전 가능한 경로’를 계산해내고 있었다.
“저쪽이다!”
철수가 외쳤다.
뒤에서 병사들의 고함이 들렸다.
“저 하인들을 잡아라!!! 산실에서 뭐가 사라졌다!”
동일은 아이를 감싸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왕궁을 지나 밖으로 이어지는 좁은 돌길. 불빛은 적었고, 메데 병사들의 창이 점점 그들을 조여왔다. 철수가 절벽 근처에 다다랐을 때 SIMON가 붉게 빛났다.
HERE – SAFE
PLACE TO HIDE
바위 틈이 열렸다. 정확히 말하면, 열렸다기보다 철수가 숨을 곳으로 최적화된 동선을 찾아냈다. 두 사람은 바위 뒤로 몸을 숨기며 아이를 지켜 안았다. 병사들의 발걸음이 바로 옆을 지나갔다. 동일은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아기의 미약한 심장 소리를 느꼈다.
“살았다… 이 아이는… 살아야 해.
살아서… 하나님의 도구가 돼야 해.”
철수도 중얼거렸다.
“고레스… 네가 언젠가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거라면… 이 순간부터 시작되는 거야.”
아기는 그 말이 들리기라도 한 듯 작게 손을 움찔였다.
그때, 철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바위 틈 입구 반대편. 어두운 곳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검은 추적자는 사람처럼 웃지 않았다. 그러나 철수는 확실히 느꼈다. 놓쳤다는 분노가 아니라, 다음 판을 준비하는 냉정함을.
동일이 낮게 말했다.
“그가… 우리를 봤어.”
철수가 대답했다.
“상관없어. 결과는 이미 정해졌어. 우린 그저… 이 순간을 통과시키는 거야.”
그들은 안전한 가정, 즉 고레스의 양부가 될 미트라다테스와 그의 아내에게 아기를 맡겼다. 그 순간 정체불명의 책이 페이지를 넘기듯 빛났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었다.
고레스는 점점 자라 영민하고 강한 소년이 되었다. 사냥을 나가도 항상 선두였고 아이들 사이에서도 지도자였다.
아스티아게스는 우연한 기회에 그를 보고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저 아이… 어딘가… 본 적이 있는 듯하다.”
역사는 본래의 궤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르파고스는 아스티아게스의 명령에 따라 그 아이의 정체를 밝히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 실패 또한, 검은 추적자 입장에선 계획이 틀어진 게 아니었다. 그는 인간들의 의심을 서로에게 붙여 궁정 전체를 서서히 병들게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성인이 된 고레스는 페르시아 군대를 이끌고 메데를 공격했다. 아스티아게스의 군대는 무너지고 고레스는 외쳤다.
“이제 메데와 페르시아는 하나다!”
철수와 동일은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동일은 눈물 한 줄기를 흘렸다.
“우리가… 살린 아이가 진짜로… 하나님이 예언하신 왕이 되었어.”
철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가… 나중에 바빌론을 함락시키고 이스라엘 포로들을 해방시키는 거지?”
“그래.”
동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는 하나님이 쓰는 연필. 우리는 그저 연필 끝을 잠시 잡아준 것뿐이야.”
장면은 또 바뀌었다. 바빌론의 성문이 열리고 유프라테스 강이 낮아진 틈으로 페르시아 군대가 밀려들었다. 고레스는 일말의 오만도 없이 백성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의 성전은 회복될 것이다! 너희의 포로 생활은 끝났다! 여호와께서 나를 일으키셨다!”
그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며 무릎을 꿇었다. 정동일도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주님… 이 모든 장면을 우리가 보게 하셨습니다…”
철수는 고레스의 옆에서 경호하듯 서 있는 장수들의 그림자 사이로 한 아이였던 그가 성장해 이 자리까지 온 주마등같은 세월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세월의 출발점엔 자신과 동일의 손끝에서 이루어진 단 한 번의 선택이 있었다.
“동일아…”
“응.”
“이 아이를 살린 게 우리의 가장 큰 사명 중 하나였던 것 같아.”
동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시거든.”
철수는 순간, 사람들 틈에서 검은 추적자의 기운이 희미하게 다시 스쳤음을 느꼈다. 그는 포로 해방의 환희를 못 이긴다. 그래서 늘 그렇다. 검은 추적자는 ‘기쁨’이 아니라 그 뒤의 ‘방심’을 노린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하나님의 선언이 너무 선명했다.
“이제… 다음은 어디일까.”
철수가 중얼거렸다.
“글쎄.”
동일이 성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삼손,
다윗,
엘리야,
그리고 고레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제… 혹시 ‘그분 자신’을 봐야 할 때가 아닐까?”
“그분…?”
“우리가 지금까지 본 모든 이야기가 흐르는 곳, 골짜기 안쪽, 중심에 계신 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철수의 가방에서 익숙하면서도 한층 무거운 빛이 흘러나왔다. 정체불명의 책이 또 한 번 스스로 열렸다. 이번에는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심장박동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페이지 위에는 이전보다 더 선명하고, 더 날카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NEXT
COORDINATE: JERUSALEM / GOLGOTHA
예루살렘. 골고다.
동일의 입술이 떨렸다.
“드디어…”
그가 속삭였다.
“십자가.”
철수는 목이 메었다.
“우리가… 정말 거기까지 가는 거야?”
동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에는 이미 예수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이번 바람은 이전과 달랐다. 승리의 바람이 아니라, 죽음과 사랑이 함께 실린 바람이었다.
빛이 다시 둘을 감쌌다. 이번 빛은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깊은 슬픔과 사랑의 기운을 함께 품고 있었다. 철수는 그 빛 속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느꼈다.
이번에는… 아마도,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막을 수 없는 일을 보게 되겠지. 동일의 마음 한편에서는 이미 기도가 시작되고 있었다.
주님… 우리가 그 자리에 서게 된다면, 눈 돌리지 않게 해 주세요.
고레스의 함성과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검은 추적자의 속삭임이, 아주 희미하게 따라붙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중심만 무너지면, 나머지는 다 무너진다.’
철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동일아… 들렸지?”
동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더… 십자가가 필요해.”
빛이 완전히 닫히며 두 사람은 역사와 역사 사이의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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